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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동작구 노량진동에 숨겨진 땅의 기억들: 논밭, 집터, 그리고 사람들 이야기

  • 2025년 9월 13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동작구 역사

노량진 땅 속에 잠든 100년의 이야기1912년, 315필지가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건다

동작구 노량진동 · 315필지 · 718,819㎡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밟고 서 있는 노량진의 아스팔트 아래 — 누군가의 삶이 고스란히 묻혀 있다.

고시원 골목, 수산시장 냄새, 지하철 환승 인파. 우리가 알고 있는 노량진의 얼굴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딱 113년 전, 이 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논에 물이 찰랑이고,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산비탈에서 바람이 불어오던 곳. 1912년 노량진동의 315필지, 718,819㎡ 기록이 오늘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말을 겁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그 땅이 전혀 다른 얼굴로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 시간을 거슬러 — 1912년 노량진동의 모습

  2. 필지와 면적 — 땅이 말하는 구조

  3. 논과 밭 — 수확의 숨결이 깃든 땅

  4. 집과 대지 — 사람들이 살던 삶의 터전

  5. 사사지, 잡종지, 산과 수도용지 — 숨겨진 공간들

  6. 성씨 소유지 — 이름과 땅이 교차하는 지점

  7. 공유지·국유지·마을소유지 — 공동체가 함께 쓰던 공간

  8. 일본인 소유 토지 — 67필지가 품은 식민지의 그림자

  9. 왜 지금 이 기록이 중요한가 —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

  10. 성공적인 문화재 발굴 사례 — 땅이 역사를 바꾼 순간들

  11.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 우리 모두가 역사의 수호자

  12. 마무리 — 노량진의 과거가 우리의 내일에 건네는 말


SECTION 01

시간을 거슬러 — 1912년 노량진동의 모습

노량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대부분은 공시생들의 거리, 수산시장, 아니면 한강 조망이 나오는 카페를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1912년, 이 땅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노량진동은 총 315필지, 718,819㎡에 달하는 광활한 땅이었습니다.

지금의 노량진역 주변과 한강변을 떠올려 보세요. 그 자리에 논이 있었고, 밭이 펼쳐져 있었으며, 크고 작은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새벽이면 논에 물 대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밭둑을 뛰어다니고, 산비탈에서 나무꾼이 땔감을 구하러 오르내리던 공간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남아있는 지적 기록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 글을 통해 깨어납니다.

이 기록은 단순한 행정 통계가 아닙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이런 역사 자료를 분석하는 이유는, 그것이 땅속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가장 정밀한 지도이기 때문입니다. 1912년의 노량진동을 이해하는 것은 곧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출발점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315총 필지 수

71.9만㎡총 면적

141밭 필지 수

118대지 필지 수

33논 필지 수

67일본인 소유 필지


SECTION 02

필지와 면적 — 땅이 말하는 구조

315개의 필지라는 숫자는 처음엔 그냥 숫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필지들을 용도별로 나눠서 들여다보는 순간, 1912년 노량진동이 어떤 공간이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논, 밭, 임야, 대지, 사사지, 수도용지, 잡종지, 국유지, 공유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땅의 구조는 한 마을이 얼마나 다양한 기능과 삶을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141필지

269,601㎡

33필지

167,445㎡

임야 (산)

19필지

112,169㎡

대지 (집터)

118필지

87,527㎡

수도용지

2필지

79,514㎡

사사지

1필지

2,251㎡

잡종지

1필지

310㎡

공유지·국유지·마을소유지

24필지

해당 면적 합산

이 표를 보면 밭이 가장 많고, 그다음 논, 임야, 대지 순으로 이어집니다. 즉 노량진동은 농경 중심의 마을이었습니다. 한강에 인접해 있었던 덕분에 수자원 확보가 유리했고, 그것이 논농사와 수도용지의 넓은 면적으로도 드러납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은 이처럼 용도별로 분류된 토지 기록을 보고, 어느 구역에서 어떤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지를 사전에 예측합니다. 지표조사 계획을 세울 때 이런 자료가 필수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SECTION 03

논과 밭 — 수확의 숨결이 깃든 땅

1912년 노량진동의 논은 33필지, 167,445㎡였습니다. 한강과 가까운 저지대에 형성된 이 논들에는 봄이면 모를 심고 여름이면 초록 물결이 일렁이고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가득했을 겁니다. 논둑을 따라 걸으며 물꼬를 트는 농부, 모내기철 단체로 나온 마을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 풍경이 지금의 노량진역 주변 어딘가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밭은 훨씬 규모가 컸습니다. 141필지, 269,601㎡. 노량진동 전체 면적의 37%를 넘는 이 밭에서는 감자, 고구마, 고추, 무, 배추 같은 다양한 작물이 자랐을 것입니다.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흙냄새와 땀이 뒤섞인 삶의 냄새. 지금 우리가 수산시장에서 맡는 비린내와는 전혀 다른, 그 시절만의 노량진 향기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 현장에서 토양 단면을 분석하면 농경지의 흔적이 실제로 드러납니다. 밭두렁의 경계선, 농경 층위, 씨앗 잔존물, 수로 흔적 등이 지표 아래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100년 전 사람들이 어떤 작물을 어디에 어떻게 심었는지를 과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습니다. 논농사 지역에서는 볍씨 탄화물이나 논둑 구조물이 출토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문화재 발굴조사가 단순히 유물을 캐는 작업이 아닌 이유입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서울 도심 개발 지역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할 때, 이런 농경지 기록은 어느 깊이에서 어떤 층위를 기대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노량진동의 논밭 기록 역시 향후 이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핵심 참고 자료가 될 것입니다.


SECTION 04

집과 대지 — 사람들이 살던 삶의 터전

집이 있던 땅, 즉 대지는 118필지에 87,527㎡였습니다. 315개 전체 필지 중 무려 37%가 집터였으니, 노량진동은 농경지 못지않게 사람들이 조밀하게 모여 살았던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가지붕의 작은 집, 마당 한편의 장독대, 처마 끝에 달린 고추 꾸러미. 그 집들 하나하나에 가족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대지들은 논밭과 임야 사이에 섞여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앞마당에선 닭이 울고 뒤편 산에서 바람이 내려오는, 지금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삶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방이 몇 개인지, 마당의 크기는 어떠했는지, 집 앞에 어떤 나무가 서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주춧돌, 아궁이 잔재, 우물터의 형태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서울 도심 발굴 현장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건물지가 반복적으로 출토됩니다. 노량진동의 118필지 대지 기록은 바로 이런 발굴의 가능성을 예고하는 데이터입니다. 땅속 어딘가에 그 집들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 —


SECTION 05

사사지, 잡종지, 산과 수도용지 — 숨겨진 공간들

노량진동에는 흥미로운 특수 용지들이 존재했습니다. 먼저 임야, 즉 산이 19필지, 112,169㎡였습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이 산들은 단순한 자연 배경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깊이 연결된 공간이었습니다. 나무를 베어 땔감을 마련하고, 산나물을 캐고, 아이들이 뛰어놀던 곳. 그리고 종종 야생동물이 출몰해 마을을 긴장시키기도 했을 것입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도용지입니다. 단 2필지에 불과하지만 면적이 무려 79,514㎡에 달합니다. 이 압도적인 면적의 수도용지는 저수지나 수원지, 혹은 공공 용수 공급 시설이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한강과 인접한 노량진의 지리적 조건을 생각하면, 물을 모아 공급하는 대형 시설이 이곳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런 수리 시설의 잔존 구조물은 매우 중요한 발굴 대상입니다.

사사지 1필지(2,251㎡)는 묘지 혹은 제사와 관련된 공간입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던 이 땅에서는 묘비 파편, 제기류, 관재 흔적 같은 유물이 지표 아래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잡종지 1필지(310㎡)는 용도가 유동적이었던 땅으로, 마을 빈터나 공동 작업 공간, 길목으로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이 작은 땅들 하나하나가 당시 마을의 생활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SECTION 06

성씨 소유지 — 이름과 땅이 교차하는 지점

1912년 노량진동의 토지 소유 기록에서 성씨별 분포를 보면, 이 마을이 어떤 가문들로 이루어졌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많은 필지를 소유한 것은 이씨로 43필지, 그다음은 유씨 42필지, 김씨 31필지, 박씨 18필지, 정씨 11필지, 신씨 10필지 순이었습니다.

이씨와 유씨가 비슷한 비율로 상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두 가문이 노량진동에서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유력 가문이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필지를 많이 가진 성씨일수록 마을 내 영향력이 컸고, 제사나 마을 행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땅의 소유는 단순한 재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공동체 내 역할을 반영하는 거울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나 도자기, 기물이 출토될 때, 이 성씨 기록은 그것이 누구의 유물인지를 추적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역사는 이런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땅의 기록과 발굴된 유물이 만나 하나의 사람, 하나의 가족, 하나의 이야기가 복원되는 것입니다.


SECTION 07

공유지·국유지·마을소유지 — 공동체가 함께 쓰던 공간

1912년 노량진동에는 공유지 18필지, 국유지 3필지, 마을 소유지 3필지가 있었습니다. 총 24필지의 이 공공 성격의 땅들은 마을이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소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공유지 18필지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던 공간이었습니다. 공동 우물 주변, 마을 마당, 공동 묘지, 두레나 품앗이가 이루어지던 공동 작업터 등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곳이 없었다면 마을의 공동체 삶은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명절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를 올리고 막걸리를 나누던 바로 그 공간이었을 겁니다.

공유지와 마을 소유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공동 우물터, 제당 터, 마을 회합 공간에는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이런 장소는 개인 소유지보다 더 풍부한 고고학적 층위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아, 발굴조사에서 귀중한 발견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SECTION 08

일본인 소유 토지 — 67필지가 품은 식민지의 그림자

1912년 노량진동에서 가장 무거운 숫자는 바로 이것입니다. 일본인 소유 토지 67필지. 합정동에서 단 1필지였던 것에 비해, 노량진동에서는 무려 67필지가 이미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전체 315필지 중 약 21%, 다섯 필지 중 하나가 이미 일본인 소유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불과 2년 만에 이 정도의 토지 소유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일제의 토지 수탈이 얼마나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67필지들은 아마도 주택 대지이거나 농경지, 혹은 수익 창출을 위한 임대 목적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 땅들 위에서 원래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 이야기는 기록 속에 숨어 있고, 발굴을 기다립니다.

일제강점기 건물지의 잔재, 당시 일본에서 들어온 도자기나 건축 자재, 그 시기의 생활용품이 지표 아래 묻혀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이런 아픈 역사의 흔적도 외면하지 않고 발굴하고 기록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 ◆ —


SECTION 09

왜 지금 이 기록이 중요한가 —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

노량진동은 지금도 변화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재개발 계획, 도로 정비, 주거지 신축이 이어지는 이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1912년의 기록이 보여주듯, 이 땅에는 논과 밭, 집터, 사사지, 수도용지, 공유지 등 다양한 문화적 잔재가 층층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 공사에 앞서 해당 지역에 매장 문화재가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공식 절차입니다. 전문 문화재 발굴 기관이 지표면과 주변 환경을 체계적으로 살피고, 역사 기록과 고지도, 이전 발굴 자료를 종합해 문화재 분포 가능성을 평가합니다. 조사 결과는 보고서로 정리되어 국가유산청에 제출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존 여부가 결정됩니다.

노량진동의 경우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들이 있습니다. 167,445㎡에 달하는 논 지역은 수로와 논둑 구조물이 잔존할 가능성이 있고, 사사지 구역은 분묘 관련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79,514㎡의 수도용지는 대규모 수리 시설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 있으며, 118필지의 대지는 건물지 유구의 보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능성이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체계적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지표조사 이후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표본조사는 사업 면적의 2% 이내에서, 시굴조사는 10% 이내에서 진행됩니다. 유적이 확인되면 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지고, 중요한 유적은 사적이나 기념물로 지정 보존됩니다. 이 과정이 빠짐없이 이루어질 때, 노량진동의 땅은 단순한 개발 부지가 아닌 역사의 증언자로 남을 수 있습니다.


SECTION 10

성공적인 문화재 발굴 사례 — 땅이 역사를 바꾼 순간들

노량진동의 가능성을 현실로 느끼기 위해, 서울에서 실제로 문화재 발굴이 역사를 바꾼 사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례들은 모두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먼저 이루어졌기에 가능했던 성과들입니다.

성공 사례 01 — 서울 인사동 공평구역, 금속활자의 기적

종로구 인사동 110번지 일원에서 진행된 도시환경정비사업 발굴조사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가 나왔습니다. 7개의 문화층에서 건물지, 공동 우물, 옛 도로 흔적이 확인되었고, 16세기 층에서는 한글과 한자가 함께 새겨진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이 출토되어 학계를 뒤흔들었습니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조선 전기 인쇄 기술과 과학 기기를 실물로 증명한 최초의 발견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공 사례 02 — 한양도성 중앙광장 발굴조사

서울역사박물관 주도로 진행된 한양도성 발굴조사에서는 고지도와 현장 조사를 병행해 성곽, 옹성, 성문의 위치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출토된 유물과 유구를 통해 조선시대 도시 방어 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가 선명하게 밝혀졌습니다. 이 발굴은 이후 주민 참여 행사로 이어져 대중의 역사 이해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공 사례 03 — 한남동 발굴조사와 분묘 유존 지역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용산구 한남동 일대에서 1912년 토지 기록을 근거로 한 문화재 시굴조사에서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가 실제로 출토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강변 마을의 생활 구조와 장례 문화를 복원하는 중요한 데이터가 확보되었습니다. 역사 기록과 현장 발굴이 맞물린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됩니다.

이 세 사례의 공통점은 명확합니다. 역사 기록을 먼저 검토하고,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철저히 진행한 다음 발굴에 착수했다는 것입니다. 노량진동도 이 경로를 따른다면,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발견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SECTION 11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 우리 모두가 역사의 수호자

역사 보존은 고고학자와 연구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노량진에 살거나 이곳을 오가는 평범한 시민 한 명 한 명이 역사의 수호자가 될 수 있습니다.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아래의 다섯 가지 중 하나만 실천해도 충분합니다.

1

공공 기록 열람하기서울시청, 동작구청,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에서 과거 지적도와 고지도를 열람해 보세요. 지금 내가 사는 동네의 100년 전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지표조사 선행 여부 확인하기주변에 재개발이나 공사 계획이 있다면 '문화재 지표조사가 먼저 이루어졌는가'를 구청이나 국가유산청에 직접 물어볼 수 있습니다. 시민의 관심이 역사를 지킵니다.

3

지역 구술사 수집에 참여하기노량진에서 오래 살아온 어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에 참여해 보세요. 1912년의 기록이 닿지 않는 부분을 구술사가 채워줍니다.

4

seoulheritage.org 팔로우하기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사이트에서 지역별 발굴 기록과 연구 결과를 꾸준히 확인해 보세요. 내 동네의 역사가 어떻게 발굴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5

SNS에 공유하기이 글을 주변에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수록, 개발 압력 앞에서 역사가 더 잘 지켜집니다.



SECTION 12

마무리 — 노량진의 과거가 우리의 내일에 건네는 말

1912년 노량진동의 315필지는 지금 우리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 안에는 이씨와 유씨 가문의 기억이 있고, 33필지의 논에서 일했던 농부의 땀이 있으며, 67필지를 빼앗겼던 사람들의 아픔이 있고, 공유지에서 함께 제를 올리던 마을 사람들의 온기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땅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단순히 옛날 물건을 캐내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잊혀진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이고, 끊어진 시간을 다시 잇는 일이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개발이 앞서갈수록, 기록과 발굴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노량진이 단순한 고시촌, 수산시장, 환승역이 아닌 '역사와 삶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이 기록들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발굴은 언제나 땅 아래에서 시작되지만, 그 첫 삽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땅을 잊지 말라 — 315필지의 기억이 당신에게 남기는 말"

1912년 노량진동의 논이 있던 자리, 밭이 있던 자리, 집이 있던 자리. 지금 그 위에 빌딩이 서고 도로가 깔렸지만,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씨 할아버지의 밭, 유씨 가문의 집터, 공유지에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지냈던 기억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발 아래, 고요한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삽을 드는 순간, 그 기억들은 다시 빛을 봅니다. 지표조사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는 순간, 잊혀졌던 이름들이 다시 불립니다.

오늘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이제 그 기억의 목격자입니다.노량진의 땅은 오늘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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