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동작구 노량진동에 숨겨진 땅의 기억들: 논밭, 집터, 그리고 사람들 이야기
- 서울 HI
- 9월 13일
- 5분 분량
동작구 노량진의 땅이 말을 걸어온다 — 1912년, 그 시간 속에서 당신에게 속삭이는 필지 하나하나의 이야기
목차
시간을 거슬러, 노량진동의 모습
필지와 면적: 땅이 말하는 구조
논과 밭, 수확의 숨결
집과 대지: 삶의 터전
사사지와 잡종지, 산과 수도용지
성씨 소유지: 이름과 땅의 교차점
공유지·국유지·마을소유지: 공공의 공간과 권리
일본인의 소유지 그리고 식민지의 여파
왜 지금 이 기록이 중요할까
문화재 발굴·지표조사와 서울 지역의 성공 사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
마무리: 노량진의 과거, 우리의 내일

1. 시간을 거슬러, 노량진동의 모습
1912년, 동작구 노량진동은 315필지, 718,819㎡에 이르는 광활한 면적을 자랑했다. 공간으로 보면 지금의 노량진동 일부, 그리고 그 주변의 자연 경관과 물길, 농경지와 산지가 조화롭게 섞인 모습이 상상된다. 사람이 살고, 밭이 있고, 논이 흐르고, 작은 산도 있고, 마을의 공유지와 국유지까지 존재하는 복합적인 공간이었다.
이곳에는 곡식의 냄새가 나고, 새벽에 물을 대는 소리, 아이들 뛰노는 마당, 산비탈에서 바람이 흩어지는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지금 남아있는 지도 조각, 필지 기록 속에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다.
2. 필지와 면적: 땅이 말하는 구조
전체 필지 수: 315필지
전체 면적: 718,819㎡
이 315개의 필지는 논, 밭, 임야, 집터(대지), 사사지, 공유지, 국유지, 잡종지, 수도용지 등 다양한 성격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면적으로 보면 가장 큰 부분은 밭, 논, 그리고 임야가 차지한다.
각 성격별 면적 및 필지 수는 아래처럼 정리할 수 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논 33필지 167,445㎡
밭 141필지 269,601㎡
임야 (산) 19필지 112,169㎡
대지 (집) 118필지 87,527㎡
수도용지 2필지 79,514㎡
사사지 1필지 2,251㎡
잡종지 1필지 310㎡
기타 (공유지·국유지·마을소유지 등) 포함 나머지 필지들 나머지 면적들
밭이 제일 많고 논, 산(임야)이 그 뒤를 잇는다. 사람들의 삶과 농경이 중심이었던 공간 구조가 드러난다.
3. 논과 밭, 수확의 숨결
논은 33필지, 면적으로 167,445㎡. 밭은 훨씬 많아서 141필지에 269,601㎡.
논은 물을 대야 하고 관리가 필요하다. 물길과 제방, 물을 끌어오는 작은 수로나 도랑 등이 논 주변에 있었을 것이다. 계절마다 논둑을 지나가는 바람, 모내기철의 인파, 가을걷이에 부르는 노래소리가 상상된다.
밭은 특히 노량진동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여러 작물을 심었을 것이다. 벼보다는 감자, 고구마, 고추, 무, 배추 따위의 작물이 많았을 테고, 밭일을 하는 소리, 햇볕 아래 굽이치는 땅의 결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논이 물을 요구했다면 밭은 햇살과 토양을 요구했다. 둘 다 계절의 흐름을 탄다. 농부의 손과 마음이 닿는 곳이다.
4. 집과 대지: 삶의 터전
집이 있던 땅, 즉 대지는 118필지에 87,527㎡.
이 대지 위에 지어진 집들에는 누가 살았을까. 자그마한 초가집일 수도 있고, 기와지붕의 중간 크기 주택도 있었을 것이다. 방이 몇 개일지, 마당이 있었는지, 창문은 어느 방향을 향했는지.
대지는 논밭과 임야 사이에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논일 한창인 계절과 산에서 내린 물소리가 들리는 계절, 집 문턱에 앉아 바라보는 하늘의 변화가 있었다.
이 대지는 또한 가족과 성씨에 따른 소유 분포가 중요하다. 대지 자체가 가족의 중심이니까.
5. 사사지와 잡종지, 산과 수도용지
사사지 1필지, 2,251㎡
잡종지 1필지, 310㎡
임야(산) 19필지, 112,169㎡
수도용지 2필지, 79,514㎡
산(임야)은 땅의 자연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나무, 작은 야생식물, 물이 스며드는 흙의 결, 그리고 산비탈이 만든 그늘과 빛의 대비. 산으로 올라가는 짧은 오솔길이 있었을 수도 있고, 돌이 흩어진 곳, 작은 동굴이나 돌무더기도 보였을 것이다.
수도용지는 놀랍도록 넓다 — 79,514㎡. 물을 저장하거나 공급하는 데 사용된 곳이다. 수원지 혹은 저수지, 또는 공공 용수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 물이 노량진 땅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수돗물 개념 이전, 물길을 따라 사람들이 물을 길러 다녔을 것이고, 우물, 계곡, 하천, 물저장 시설 등이 있었다면 이 땅의 수자원과 경작지의 연결이 컸을 것이다.
사사지(묘지 역할을 하는 땅)도 존재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잡종지는 용도가 명확치 않은 땅, 여러 용도로 섞여 있는 땅이다. 길목, 작은 광장, 비어 있는 빈터 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6. 성씨 소유지: 이름과 땅의 교차점
누가 땅을 얼마나 소유했는가, 이 것은 권력, 가족, 혈연, 지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씨: 43필지
유씨: 42필지
김씨: 31필지
박씨: 18필지
정씨: 11필지
신씨: 10필지
기타 성씨들 포함
이름이 땅 위에 서 있다. 이씨, 유씨 같은 성씨는 노량진동에서 비교적 많은 필지를 소유했다. 필지 수만 보면 대지와 농경지, 임야, 기타 용도 등에 걸쳐 여러 필지를 보유했다는 뜻이다.
땅을 많이 가진 성씨일수록, 그 지역에서 영향력 있거나 오래 살아온 가문일 가능성이 크다. 벼슬 있는 사람, 부유한 지주, 또는 지역 유지들이었을 것이고, 그들의 소유지는 단순한 자산 그 이상이었다.
7. 공유지·국유지·마을소유지: 공공의 공간과 권리
공유지: 18필지
국유지: 3필지
마을 소유의 땅: 3필지
공유지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땅이다 — 길목, 공동 우물 주변, 공동 묘지, 공동 제사터, 마을 마당 등이었을 것이다. 이곳이 없었다면 공동체 삶이 이어지기 어렵다.
국유지는 오늘날의 국가 소유지 개념과 유사하다. 관리 주체가 중앙 혹은 지방 정부였을 가능성이 있고, 군사적, 행정적, 공공적 목적을 위해 존재했을 수 있다.
마을 소유지(공동체 소유지)는 마을 단위로 공동 사용하거나 관리하는 땅이다. 제례, 공동 행사, 혹은 공동 농경 등에 쓰였을 가능성 있다.
8. 일본인의 소유지 그리고 식민지의 여파
1912년은 일제강점 초기. 일본인들이 토지 소유를 확대하던 시기가 막 시작된 때다. 노량진동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인 소유지: 67필지
67필지라 함은 꽤 많은 수다. 면적까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필지 수가 많다는 것은 여러 필지들이 각각 작거나 중간 크기였을 것이며, 일본인 거주자 또는 기업, 기관 등이 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땅들은 아마도 주택 대지이거나, 수익을 위해 임대되거나 농업용으로 사용된 땅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일본인의 소유지는 이후의 도시 변화, 지가 상승, 인구 밀집 등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9. 왜 지금 이 기록이 중요할까
이 기록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도시 변화의 출발점: 도시가 농지와 산지를 쪼개고, 대지가 늘어나고, 수요 중심의 도시공간이 형성된 과정이 여기에 있다.
사회 계층과 권력 구조: 성씨별 땅 소유로 유력 가문의 위치, 일본인의 토지 소유로 식민지 구조가 드러남.
문화재 유구 가능성: 과거의 집터, 논밭 구조, 수도용지, 산지 등이 남아 있을 가능성.
도시계획과 보존의 근거: 현재 노량진 지역의 개발, 재개발, 보행공간, 녹지 등을 고민할 때 이 과거의 토지구조가 기준점이 된다.
역사적 정체성: 지역 주민, 연구자, 행정기관이 노량진의 “원래 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
10. 문화재 발굴·지표조사와 서울 지역의 성공 사례
“문화재 발굴조사”, “지표조사”, “표본조사”란, 과거의 유적이나 유물이 땅속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미리 조사하는 작업이다. 발굴은 땅을 파보는 것, 지표조사는 땅 표면을 조사하는 것, 표본조사는 작은 시료를 뽑아 분석하는 것 등. 서울에서도 여러 성공 사례가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한양도성, 의정부지, 종묘광장, 수유동 가마터 등을 발굴하여 서울의 역사적 중심 구조와 주거지, 공공시설의 변천사를 밝혀냈다.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에서 노량진이 조사 대상 지역으로 여러 차례 포함되어, 지적도, 지도, 사진 자료를 통해 근현대 노량진의 공간 변화 등이 기록됨.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들이 과거 지도와 기록을 바탕으로 1912년과 같은 시점의 땅과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조명하며, 잊혀진 공간과 소유 관계, 지형 변화 등을 복원하는 연구를 지속 중임.
성공 사례로는 한 예로 한양도성 중앙광장 발굴조사를 들 수 있다. 과거 지도와 고지도를 비교하여 성곽, 옹성, 성문 등의 위치를 복원하고, 출토된 유물과 유구를 통해 조선시대 도시 방어 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선명히 밝힌 것이다. 주민 참여 행사도 열려 대중의 이해가 높아졌다.
11.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
공공 기록 열람: 과거 지적도, 고지도, 과거 사진 등을 보관한 기관 (서울시·동작구청·서울역사박물관 등)의 아카이브를 열람하고, 지도 비교 작업을 해보면 좋다.
지표조사 참여 또는 요청: 노량진 지역에 개발이나 재개발 혹은 대형 건축 계획이 있을 때, 발굴 혹은 지표조사를 의뢰하거나 예비 조사로 포함되게 할 수 있다.
지역 역사 조사 프로젝트: 주민들과 협력하여 과거 소유자 성씨, 필지 경계, 마을 경계, 옛 삶의 공간에 대한 구술사 수집 등을 하면 풍성한 자료가 된다.
보존 정책 제안: 개발만 앞서지 않도록, 발굴 조사 결과를 도시계획 및 재개발 정책에 반영하도록 행정에 목소리를 내는 것.
교육 및 전시 활용: 지역 문화재 또는 과거 땅의 구조를 전시하거나 워크숍 자료로 활용하여 노량진의 역사적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
12. 마무리: 노량진의 과거, 우리의 내일
1912년 노량진동의 땅들은 단순한 땅이 아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살고, 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죽음을 기리던 기억들이 있고, 공유와 국유의 개념, 일본인의 식민지 정착이 시작된 흔적, 마을 공동체의 공존 등이 녹아 있다.
우리가 지금 노량진을 보면서 느끼는 삶의 소음, 거리의 변화, 상권의 흐름, 재개발과 신축빌딩의 향기가 있기 전에, 이 땅들은 논과 밭이었고, 산과 대지가었으며, 마을의 삶이 흘러가던 터전이었다.
이 기억들을 잊지 않고, 문화재 발굴 조사와 지표 조사, 표본 조사 등을 통해 과거의 흔적을 복원한다면 노량진이 단순한 삶의 공간이 아니라 역사적 자산으로, 정체성과 기억의 터전으로 거듭날 수 있다.
해시태그
노량진, 표본조사, 시굴조사, 문화재지표조사, 서울 동작구
글 출처는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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