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노원구 월계동의 땅이 들려준 숨겨진 이야기, 지금 서울에서 발굴이 시작된다

  • 2025년 11월 22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4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조사 · 서울 노원구 월계동 역사 · 발굴조사 의뢰 · 동양척식주식회사 · 유적발굴단


이 한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의 눈 앞에 백 년 전 월계동의 땅이 깨어난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 월계역 앞 골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평지, 그 옆 작은 능선 하나까지 모두 문화재 발굴과 유적 발굴, 유물 발굴 작업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2년의 월계동은 921필지 2,006,723㎡. 논 478필지가 끝없이 펼쳐지고, 최씨·이씨·송씨가 이 들판을 지키고, 연못 3필지가 마을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던 그 시절이었다.

이 글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1912년 월계동 토지 기록을 바탕으로, 발굴조사를 고민하는 사람과 서울 역사가 궁금한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마지막까지 읽으면 발굴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목차

1월계동, 1912년의 땅이 말해준 풍경

2지표조사에서 드러난 논·밭·마을의 구조

3성씨별 토지 소유가 보여준 사람들의 삶

4국유지·법인·동양척식주식회사 토지의 의미

5오늘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6성공 사례로 보는 서울 발굴의 실제 변화

7독자가 마음속 깊이 흔들리는 결말


921

총 필지 수

2,006,723㎡

총 면적

478

논 필지

374

밭 필지

145

최씨 필지

3

연못(지소) 필지


1. 월계동, 1912년의 땅이 말해준 풍경



1912년의 노원구 월계동은 전체 921필지 총면적 2,006,723㎡였다. 이 시리즈에서 함께 들여다본 창동(735필지 2,399,428㎡), 중계동(577필지 1,761,561㎡), 쌍문동(550필지 1,176,084㎡)에 이어 월계동은 필지 수 921개로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많은 필지를 가진 동네로 기록된다.

그 시대를 상상하면 도시의 콘크리트 대신 끝없이 펼쳐진 논의 바람결과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용하게 들리는 흙길이 먼저 떠오른다. 논 478필지 1,502,241㎡. 월계동 전체 면적 2,006,723㎡의 74.9%가 논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넓은 논을 품고 있던 동네 중 하나였다. 이것이 지금도 공사 전에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주변을 따라 밭 374필지 439,304㎡가 이어졌다. 하루라도 농사일에서 손을 뗄 수 없던 시절, 밭은 삶 자체였다. 대지는 57필지 43,782㎡로 비교적 소박한 규모였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그리고 임야 7필지 18,489㎡와 연못 3필지 2,307㎡가 이 풍경을 완성했다.

478필지

1,502,241㎡ (74.9%)

374필지

439,304㎡

대지

57필지

43,782㎡

임야

7필지

18,489㎡

연못(지소)

3필지

2,307㎡

월계동 논 비율 74.9%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 창동(69%)을 넘어서는 최고 수치다. 논이 전체 면적의 3/4을 차지하는 이 구성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수계 관련 유구, 수로 시설, 저습지 유적 출토 가능성을 가장 높게 평가받는 유형이다.


2. 지표조사에서 드러난 논·밭·마을의 구조



지표조사란 눈에 보이는 지형·지물·지표 흔적을 기반으로 그 아래에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1912년 월계동의 토지 구성은 오늘날 지표조사 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논의 비중이 높은 지역은 저습지와 수리 시설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밭이 많은 구역은 경작 활동의 층위가 반복적으로 쌓여 흔적 보존도가 높다.

대지가 모여 있던 57필지 구역은 생활 유구가 나올 확률이 높은 자리다. 임야 7필지는 장기간 비가공 상태로 남아 문화재발굴조사 장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 된다. 임야는 인위적으로 훼손되지 않은 땅속에서 과거의 흔적이 그대로 살아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연못 3필지 2,307㎡는 주목할 만하다. 연못 주변은 과거 작은 제의 활동이나 농업용 구조물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유물 발굴의 주요 조사 지점으로 꼽힌다. 수변 지역의 토양 특성상 목제 유물의 보존 가능성도 높다. 1912년 기록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지금 발굴조사원이 땅을 파기 전 어떤 지점에서 유적 발굴이 이루어질지 예측하는 지도로 기능한다.


3. 성씨별 토지 소유가 보여준 사람들의 삶



1912년 월계동은 최씨 145필지, 이씨 128필지, 송씨 101필지, 김씨 97필지, 윤씨 82필지 등 다양한 성씨들이 토지를 나눠 소유하고 있었다. 이 다섯 성씨만 합치면 553필지로 전체 921필지의 60%를 차지한다. 조상들의 생활권과 이동 경로, 공동체 변화를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다.

특히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성씨 분포 구조가 있다. 최씨 145필지가 1위라는 사실이다. 이씨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창동(153필지), 중계동(128필지), 쌍문동(127필지)과 달리, 월계동에서는 최씨가 가장 강한 지역 기반을 가진 성씨였다. 이는 월계동이 서울 북부권에서 독자적인 씨족 문화를 형성했던 공간임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서다.

오늘날 유적 발굴, 문화재 발굴에서 집성촌 흔적은 언제나 주요 조사 의제 중 하나로 다뤄진다. 최씨 145필지가 집중된 구역을 특정하면, 그 구역에서 조선 후기 생활 유구와 공동 시설 흔적이 가장 풍부하게 나올 가능성이 높다. 성씨별 필지 분포는 발굴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오래된 나침반이다.

145

최씨 필지

128

이씨 필지

101

송씨 필지

97

김씨 필지

82

윤씨 필지

4

동양척식

6

법인 소유

2

국유지


4. 국유지·법인·동양척식주식회사 토지의 의미

국유지는 2필지, 법인 소유는 6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토지는 4필지였다. 신내동(72필지), 중계동(30필지), 쌍문동(20필지)과 비교하면 월계동의 동양척식 소유 4필지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치다. 전체 921필지의 0.4%에 불과하다. 이는 월계동이 도심 상권과 주요 농경지에 비해 식민지 토지 정책의 직접적인 수탈 대상에서는 비교적 비켜나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법인 소유 6필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리즈에서 법인 소유가 6필지에 달하는 동네는 월계동이 처음이다. 신영동의 법인 소유 2필지, 창동의 법인 소유와 비교해도 월계동의 6필지는 두드러진다. 근대 초기 학교 법인이나 종교 법인의 토지일 가능성이 있고, 서울 발굴 현장에서 이러한 법인 소유 토지가 확인되면 조사 과정은 훨씬 더 신중해진다. 유물 발굴 작업의 성격이 단순 과거 추적을 넘어 역사 정리의 단계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4필지(0.4%) vs 법인 소유 6필지(0.7%). 월계동에서는 식민지 기관보다 법인 소유 토지가 더 많았다. 이 역전 현상은 이 시리즈에서 월계동이 처음이며, 월계동의 근대화 과정이 다른 도봉·노원구 동네들과 다른 경로를 밟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5. 오늘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1단계

지표조사

월계동처럼 논이 74.9%인 지역에서는 수계 흔적, 수로 방향, 지형의 굴곡을 지표에서 먼저 확인한다. 1912년 토지대장이 핵심 참고자료다.

2단계

시굴조사

논이 많은 저지대에서는 수리 시설 기초나 저습지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시굴 구역 선정에 연못 3필지 위치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3단계

표본조사

최씨 집중 구역과 법인 소유지 구역을 별도로 분류해 조사한다. 두 구역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4단계

발굴조사

전체 면적을 열고 유물 발굴이 본격 시작된다. 아파트 공사, 학교 신축, 도로 정비 등 어느 현장이라도 땅을 건드리기만 하면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6. 성공 사례로 보는 서울 발굴의 실제 변화



성공 사례 — 노원구 일대 조선 후기 생활유구 발굴

실제로 노원구 일대에서도 과거 농경지 지형을 따라 조선 후기 생활유구가 확인되면서 개발 계획이 일부 조정된 사례가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새 아파트를 짓기 전 이루어진 발굴에서 조선시대 우물과 담장 흔적이 발견된 사례, 청계천 주변 공사에서 조선 초기 기와가 대량 확인된 사례도 이어진다. 이런 성공 사례는 지역 정체성을 강화하고 도시의 스토리텔링 기반이 된다. 발굴은 개발을 막는 작업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개발을 위한 필수 단계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참고)

1912년 토지대장은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왜 필요한지 정면으로 증명한다. 월계동처럼 기록이 명확한 지역일수록 발굴 방향이 정밀해지고, 방향이 정밀할수록 잃어버릴 뻔한 역사가 더 온전히 돌아온다.


7. 독자가 마음속 깊이 흔들리는 결말



백 년 전 월계동의 논과 밭, 작은 연못과 산자락, 그 위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기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기록은 오늘 우리의 발밑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을 뿐이다. 최씨 145필지가 지키던 들판, 송씨·김씨·윤씨가 어깨를 맞대던 논두렁, 연못 3필지 주변에서 계절마다 이루어지던 농업의 리듬. 그것이 지금 월계역 앞 아파트 단지 아래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우리가 발굴조사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땅을 파기 위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발굴조사를 하는 이유는 시간을 파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는 오늘도 그 일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발굴은 개발을 막는 작업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개발을 위한 필수 단계다.

1912년 월계동의 921필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논 478필지의 바람결, 최씨·이씨·송씨의 발자국, 연못가의 계절이


지금도 그 땅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발굴조사를 하는 이유는 시간을 파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알려주세요.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에 관심 있는 분들께 공유해주세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문화재발굴

유적발굴

발굴조사

지표조사

발굴조사의뢰

월계동역사

노원구이야기

서울문화유산

옛서울기록

1912년서울

서울역사

동양척식주식회사

연못유적발굴

서울여행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