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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구로구 항동의 땅이 말해주는 이야기

  • 2025년 7월 12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1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기관구로구 역사김씨 씨족 마을서울 문화유산

220필지 중 103필지의 주인이 김씨였다— 구로구 항동 1912년, 씨족 마을의 진짜 얼굴

195만㎡의 광활한 농촌 마을에서 김씨 가문이 전체의 47%를 단독 지배하고 있었던 이야기 — 그리고 그 씨족 마을이 왜 지금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대상인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seoulheritage.org·읽는 시간 약 12분

"220필지 중 103필지.


이 동네 땅의 거의 절반이 김씨 가문의 것이었다.


씨족 마을. 대를 이어 같은 땅을 지켜온 가문.


그 가문의 무덤이, 집터가, 문중 시설이


지금도 항동 땅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구로구 항동. 지금은 항동 생태공원과 소박한 주거지가 어우러진 조용한 동네다. 1912년의 기록을 열어보면 220필지, 약 195만㎡의 광활한 농촌 마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마을의 가장 충격적인 특징 하나 — 전체 필지의 47%가 김씨 단일 가문의 소유였다는 것이다.

이 글은 항동 1912년 기록이 말해주는 씨족 마을의 구조를 들여다보며, 왜 이런 마을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를 이야기한다.


목차 — 이 글의 흐름

1. 항동, 항구처럼 사람을 품었던 마을의 1912년

2. 논 97필지, 밭 113필지 — 농사가 전부였던 마을

3. 집터 8필지 — 일하는 공간이 사는 공간보다 컸다

4. 김씨 103필지 — 이 숫자가 말하는 씨족 마을의 구조

5. 임씨·배씨·이씨·서씨 — 나머지 53%의 이야기

6. 씨족 마을과 문화재 지표조사의 특별한 관계

7.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이 순서가 전부다

8. 성공 사례 — 씨족 마을에서 역사가 돌아온 순간들

9. 항동 개발과 지표조사의 현재

10. 땅이 기억하는 시간을 지키는 것


1. 항동, 항구처럼 사람을 품었던 마을의 1912년

항동(航洞)이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지역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로구 서쪽, 지금의 부천시와 인접한 경계 지역이었던 항동은 서울 외곽의 고요한 농촌이었다. 1912년 당시에는 서울 시역 편입 전의 경기도 시흥군 땅이었지만, 지금은 구로구에 속한다.

220필지, 약 1,950,000㎡. 지금 기준으로 축구장 273개 면적이다. 그 광활한 땅에서 97필지의 논과 113필지의 밭이 마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논밭의 절반 가까이를 김씨 한 가문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 마을의 구조가 얼마나 강한 씨족 중심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220필지

총 필지 수

1,950,000㎡

총 면적 (추정)

103필지

김씨 소유 (47%)

97필지

113필지

8필지

집터



2. 논 97필지, 밭 113필지 — 농사가 전부였던 마을

논 97필지, 342,847㎡. 밭 113필지, 274,887㎡. 이 둘을 합치면 210필지, 전체 220필지의 95%가 농경지였다. 항동은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동네 중 농경지 비율로는 거의 최상위권이다. 씨족 중심 마을이 이렇게 높은 농경지 비율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를 이어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그 땅이 다시 후손에게 이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논보다 밭이 필지 수가 더 많다는 점도 흥미롭다. 가리봉동(논 342필지 vs 밭 134필지)과 반대 방향이다. 항동은 논보다 밭이 더 세분화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김씨 가문이 소유한 103필지 중 상당 부분이 이 밭이었을 것이다. 한 가문이 관리하는 수십 필지의 밭. 계절마다 작물을 교체하고, 대대로 이어온 농업 방식이 이 밭들에 새겨져 있었다.

113필지 / 274,887㎡ / 51%

97필지 / 342,847㎡ / 44%

대지

8필지 / 23,590㎡

임야

2필지 / 10,975㎡



3. 집터 8필지 — 일하는 공간이 사는 공간보다 컸다

집터 대지 8필지, 23,590㎡. 220필지 중 겨우 8필지가 집터였다. 3.6%에 불과하다. 논과 밭이 95%인 이 마을에서 집은 극도로 적다. 씨족 마을이기 때문에 이 8채의 집이 모두 같은 성씨 또는 가까운 친족들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8채의 집들은 아마도 논밭 중심부가 아니라 마을 입구나 구릉지 아래쪽에 모여있었을 것이다. 한 집에서 나온 연기가 옆집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었을 그 작은 마을. 지금 항동 어딘가에 그 8채의 기단석이 잠들어 있다.

95%

논+밭

210필지, 일하는 공간

3.6%

집터

8필지, 사는 공간


4. 김씨 103필지 — 이 숫자가 말하는 씨족 마을의 구조

220필지 중 103필지가 김씨 소유였다. 47%다. 거의 절반이 한 가문의 것이었다.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동네들의 최다 소유 성씨 비율을 비교해보면, 청담동 이씨(58%), 장지동 김씨(35%), 자곡동 이씨(?)에 이어 항동 김씨가 47%로 압도적인 편이다.

47%의 김씨. 이건 단순한 땅 소유가 아니었다. 마을의 경제를 지배하고, 마을의 의사결정을 이끌고, 대대로 이어온 농업 방식과 문화를 유지하는 구심점이었다. 씨족 마을에서 특정 가문이 이렇게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건 그 가문이 마을을 처음 개척했거나, 오랜 세월 동안 단독으로 지켜온 정착지라는 뜻이다.

항동 김씨의 압도적 지배 — 씨족 마을의 물증

103필지

김씨 소유 필지

전체 220필지의 47%. 이 수치는 항동이 오랜 세월 김씨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 마을이었음을 실물로 증명한다. 김씨 집중 구역에서는 문중 사당, 종중 묘지, 가문 공동 창고, 경계석 등이 발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5. 임씨·배씨·이씨·서씨 — 나머지 53%의 이야기

김씨 103필지가 47%를 차지하고 나머지 53%는 임씨 30필지, 배씨 18필지, 이씨 17필지, 서씨 11필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 성씨를 합치면 76필지. 김씨(103필지)보다 적지만 이들도 항동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임씨 30필지는 항동에서 두 번째로 큰 가문이었다. 김씨와 임씨가 함께 이 마을의 두 축을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배씨, 이씨, 서씨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가문의 경계 구역, 특히 김씨와 임씨의 경계 지점이 지표조사에서 흥미로운 발굴 포인트가 된다.

김씨

103필지


47% — 씨족 지배

임씨

30필지


두 번째

배씨

18필지

이씨

17필지

서씨

11필지


6. 씨족 마을과 문화재 지표조사의 특별한 관계

항동처럼 씨족 중심의 마을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인 마을과 달리, 씨족 마을에는 특정 가문과 관련된 유구가 훨씬 더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기 때문이다.

김씨 가문이 오랜 세월 지켜온 103필지에는 어떤 것들이 남아있을까. 종중 사당의 기단석, 가문 공동 우물, 문중 묘지의 부장품, 대대로 경작한 밭의 경계석. 이런 유구들이 항동 땅속에 켜켜이 쌓여 있을 수 있다. 씨족 마을의 유적은 개인 가구의 유적보다 더 체계적이고 풍부한 경향이 있다. 가문 전체가 관리하고 유지했기 때문이다.

2019년 서울 동작구의 한 개발 부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조선 후기 도로 흔적과 우물터가 발견된 사례는, 항동처럼 오랜 정착 역사를 가진 마을에서 지표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7.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이 순서가 전부다

STEP 1

지표조사

기록·현장


비파괴 분석

STEP 2

표본조사

2% 이내


탐색 발굴

STEP 3

시굴조사

10~20%


예비 발굴

STEP 4

정밀 발굴

면 단위


전면 기록

STEP 5

기록·보존

보고서·전시


역사 활용

항동처럼 씨족 마을 성격이 강한 지역에서 이 순서가 더욱 중요하다. 김씨 가문의 문중 유적과 임씨 가문의 유적이 서로 다른 구역에 분포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표조사를 통해 각 구역의 성격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씨족 마을의 유적은 한 구역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시굴조사 위치 선정이 특히 중요하다.

성공 사례 01

서울 동작구 개발 부지 — 조선 후기 도로와 우물터의 귀환

2019년 서울 동작구의 한 개발 부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조선 후기 도로 흔적과 우물터가 발견되었다. 원래 단순 철거 후 아파트를 짓는 용도였지만, 조사 덕분에 서울시가 역사유산을 보존하고 역사교육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항동처럼 오랜 정착 역사를 가진 마을에서도 같은 방식의 발견이 기대된다.

성공 사례 02

구로구 인근 씨족 마을 — 문중 사당터 확인

구로구 인근 씨족 마을 특성이 강한 지역에서 1912년 토지 기록을 기반으로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특정 가문의 문중 사당 터와 기단석이 확인된 사례가 있다. 단독 소유자가 집중된 구역에서 가문 공동 시설의 흔적이 발굴되는 대표적 유형이다. 항동 김씨 103필지 구역에서도 같은 방식의 접근이 유효하다.

성공 사례 03

종로구 인사동 — 절차를 지킨 곳에서 금속활자가 나왔다

종로구 인사동에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7개의 문화층과 16세기 금속활자가 출토되었다. 이 발견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 순서를 지켰기 때문이다. 항동의 김씨 씨족 마을도 이 순서를 지켰을 때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알 수 없다.



8. 씨족 마을과 항동 개발의 현재

항동은 지금도 서울에서 비교적 자연이 잘 보존된 동네다. 항동 생태공원, 부천시와 이어지는 논밭 지대, 조용한 주거지. 하지만 서울의 재개발 흐름이 항동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에, 김씨 가문이 103필지에 남긴 흔적들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씨족 마을의 유적은 한 번 파괴되면 복원이 불가능하다. 대를 이어 쌓아온 그 흔적들이 포클레인 한 번에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 개발 전 지표조사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에 의뢰하면 지표조사부터 시굴조사, 발굴조사, 보고서 작성, 인허가 절차까지 전 과정을 지원받을 수 있다.



9. 땅이 기억하는 시간을 지키는 것

항동 땅을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자.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길 아래 어딘가에 김씨 가문이 대를 이어 지켜온 논의 물꼬 돌이 있을 수 있다. 임씨 가문과의 경계를 표시하던 돌 하나가 있을 수 있다. 오래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우물을 팠던 그 자리가 있을 수 있다.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기록은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의 뿌리를 보여준다. 그 뿌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무엇 위에 서있는지 모르는 셈이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뿌리를 찾는 작업이다. 기억의 복원이자, 도시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다.

"220필지 중 103필지가 김씨의 것이었다.


그 가문이 이 땅에 남긴 흔적이


지금도 항동 어딘가에 있다.


그것을 찾는 것이


도시 생애사 탐험의 시작이다."



항동 어딘가, 지금도 김씨 가문의 흔적이


땅속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103필지를 지키며 대를 이어 살았던


그 이름 모를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지표조사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의 시작을 요구하는 것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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