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구 가리봉동, 100년 전 그 땅의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 2025년 7월 22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1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기관구로구 역사가리봉동 과거서울 문화유산
지금은 공단이지만, 1912년엔 축구장 800개 크기의 논과 연못이 있었다— 구로구 가리봉동의 잊힌 기록
572필지 1,951,132㎡의 거대한 농경 마을 — 김씨·박씨 116필지, 연못 16필지,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가 산업단지 아래 잠든 역사를 꺼내는 방법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읽는 시간 약 14분
"가리봉동 공단오거리 어딘가 아래에
1912년 축구장 180개 크기의 논이 있었다.
그리고 16개의 연못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지금 그 연못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바닥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을까."
구로구 가리봉동. 지금은 공단과 아파트, 다문화 상권이 뒤섞인 서울 서남쪽의 특색 있는 동네다. 가리봉동이라는 이름은 주위에 이어진 작은 봉우리들에서 왔거나, '갈라졌다'는 뜻의 옛말 '가리'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그 이름이 붙기 훨씬 전, 1912년의 가리봉동은 서울에서도 손꼽힐 만한 광활한 농경지였다.
572필지, 1,951,132㎡. 축구장 약 273개를 합친 면적. 이 넓은 땅 위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연못이 물을 가두고, 사사지에서 제를 올리던 마을 공동체가 살아있었다. 이 글은 그 기록을 들춰가며, 지금 이 땅 아래에 어떤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를 꺼낸다.
목차 — 이 글의 흐름
1. 가리봉동,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2. 논 342필지 — 이 동네의 69%는 물이 가득한 논이었다
3. 잡종지 38필지 — 정의 불가능한 땅의 이야기
4. 연못 16필지 — 마을 물의 보고, 지금 어디 갔을까
5. 사사지와 대지 — 작지만 의미 깊은 공간들
6. 김씨·박씨 각 116필지 — 이 마을의 두 중심 가문
7. 문화재 지표조사, 산업단지 아래를 읽는 방법
8.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이 순서가 전부다
9. 성공 사례 — 산업단지에서 역사가 돌아온 순간들
10. 가리봉동 땅의 기억을 지켜야 할 이유
1. 가리봉동,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가리봉동은 조선 말까지 경기도 시흥군 동면 가리산리였다가 가리봉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기록에 이미 가리봉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이 이름이 자리 잡혀 있었다. 1963년이 되어서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고, 1980년 구로구가 생기면서 구로구 가리봉동이 되었다.
그 오랜 이름 속에 이 동네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사람이 살아온 땅인지가 담겨 있다. 1912년의 기록이 남겨진 건 그 기나긴 역사 중 한 조각이다. 그리고 그 조각이 지금 우리가 이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572필지
총 필지 수
1,951,132㎡
총 면적
342필지
논
134필지
밭
16필지
연못
38필지
잡종지

2. 논 342필지 — 이 동네의 69%는 물이 가득한 논이었다
논 342필지, 1,348,564㎡. 전체 면적 1,951,132㎡의 69%가 논이었다. 가리봉동은 서울에서도 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지금 공단오거리와 주택가가 들어선 그 광활한 땅이, 1912년에는 거의 전부가 물이 가득한 논이었다는 이야기다.
왜 가리봉동에 이렇게 논이 많았을까. 시흥군 동면, 즉 지금의 구로 일대는 안양천과 그 지류들이 흐르는 저지대 지역이었다. 물이 풍부하고 토질이 비옥해 벼농사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봄이면 모내기, 여름이면 김매기, 가을이면 추수. 342필지의 논에서 매년 이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논 유적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독특한 조사 대상이다. 논바닥의 점토층은 유기물 보존에 유리한 환경을 만든다. 농기구, 씨앗, 볏짚 관련 유기물, 그리고 논두렁 경계 구조물들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수 있다. 342필지의 논이 남긴 지층 흔적이 지금도 가리봉동 땅속 어딘가에 있다.
논
342필지 / 1,348,564㎡ / 69%
잡종지
38필지 / 262,748㎡ / 13%
밭
134필지 / 263,541㎡ / 13%
대지
38필지 / 59,114㎡
연못
16필지 / 14,115㎡
임야
3필지

3. 잡종지 38필지 — 정의 불가능한 땅의 이야기
잡종지 38필지, 262,748㎡. 밭 134필지의 면적(263,541㎡)과 거의 같은 크기다. 잡종지는 행정적으로 명확히 분류되지 않는 다양한 용도의 땅이다. 창고, 임시 주거지, 가축 우리, 간헐적 경작지, 또는 아직 용도가 결정되지 않은 미활용 땅.
이 '정의 불가능한 땅들'이 문화재 조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흥미롭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는 건, 지표조사를 통해 실제 사용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리봉동의 잡종지 38필지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다. 서울 남부 산업단지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종종 이런 잡종지 구역에서 나온 경우도 있다.
4. 연못 16필지 — 마을 물의 보고, 지금 어디 갔을까
연못 16필지, 14,115㎡. 이 숫자가 가리봉동 기록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16개의 연못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농업용 물 저장고이자, 마을 사람들과 동물이 함께 사용하던 공동의 수공간이었다.
가뭄이 들면 논에 물을 끌어오고, 장마가 지면 넘치는 물을 가두는 연못. 그 연못가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물소를 이끌고 온 농부가 잠시 쉬었을 것이다. 16개의 연못이 만들어낸 소리들이 지금은 아스팔트와 건물 소음으로 완전히 덮여있다.
연못 퇴적층이 문화재 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연못 바닥의 퇴적층은 문화재 발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물이 고인 환경은 유기물 보존에 유리하다. 도기, 목제품, 씨앗, 동물뼈 같은 유물들이 퇴적층 안에 비교적 잘 보존될 수 있다. 가리봉동의 16개 연못 자리에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진행한다면, 당시 마을 생활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물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5. 사사지와 대지 — 작지만 의미 깊은 공간들
사사지 1필지, 85㎡. 단 하나의 사당 또는 제단 공간. 85㎡는 약 25평 남짓으로 작은 규모지만, 이 공간이 마을 공동체에서 가지는 의미는 크다. 사사지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제를 올리고, 공동의 신앙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이 단 하나의 사사지에서 마을 전체의 의식 생활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대지 38필지, 59,114㎡. 572필지 중 38필지만이 집터였다. 전체의 6.6%에 불과하다. 1912년 가리봉동은 집보다 논이 압도적으로 많은 공간이었다. 38채의 집들은 논과 연못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했을 것이다. 그 집들이 남긴 온돌 구조물, 우물, 담장 기초가 지금도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6. 김씨·박씨 각 116필지 — 이 마을의 두 중심 가문
1912년 가리봉동 토지 소유자 분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이 있다. 김씨와 박씨가 각각 116필지로 정확히 같은 수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공동 1위다. 그 뒤로 유씨 30필지, 최씨 26필지, 이씨 23필지, 문씨와 윤씨 각 19필지, 양씨와 홍씨 각 17필지, 염씨와 조씨 각 15필지, 강씨 11필지 순이었다.
12개 이상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는 건, 가리봉동이 단일 가문 중심이 아닌 다양한 공동체가 모여 이룬 복합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김씨와 박씨가 같은 수의 필지를 가졌다는 건, 이 두 가문이 마을의 균형 있는 두 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이중 중심 구조의 마을에서는 두 가문의 경계 구역이 흥미로운 발굴 포인트가 된다.
김씨
116필지
공동 1위
박씨
116필지
공동 1위
유씨
30필지
최씨
26필지
이씨
23필지
문씨
19필지
윤씨
19필지
국유지
13필지
공공 관리

7. 문화재 지표조사, 산업단지 아래를 읽는 방법
가리봉동처럼 논 69%, 연못 16개, 다양한 성씨의 복합 공동체였던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는 어떻게 접근할까.
첫 단계는 역시 기록 분석이다. 1912년 토지 대장에서 논 342필지의 분포, 16개 연못의 위치, 김씨와 박씨 각 가문의 집중 구역을 파악한다. 연못이 있었던 자리는 퇴적층 분석의 핵심 포인트다. 김씨와 박씨의 경계 구역은 두 가문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유구가 나올 수 있는 곳이다.
현장 답사에서는 지금의 공단 부지와 주거지 사이에서 지형의 미세한 변화를 관찰한다. 과거 논이었던 곳은 지금도 미세하게 저지대를 형성하고 있을 수 있다. 연못이었던 자리는 배수 패턴이 주변과 다를 수 있다. 이런 지형적 흔적들이 발굴 위치를 결정하는 단서가 된다.
8.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이 순서가 전부다
STEP 1
지표조사
문헌·현장
비파괴 분석
STEP 2
표본조사
2% 이내
탐색 발굴
STEP 3
시굴조사
10~20%
예비 발굴
STEP 4
정밀 발굴
면 단위
전면 기록
STEP 5
보존·전시
유물 기록
문화 활용
가리봉동처럼 산업단지로 변한 지역에서 재개발이나 정비사업이 이루어질 때마다 이 절차가 지켜져야 한다. 산업단지 조성 과정에서 이미 많은 것이 사라졌을 수 있지만, 논바닥 퇴적층이나 연못 바닥처럼 깊은 곳에 보존된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역할이다.
9. 성공 사례 — 산업단지에서 역사가 돌아온 순간들
성공 사례 01
서울 남부 산업단지 — 산업과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서울 남부 산업단지에서 문화재지표조사부터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 이어진 사례가 있었다. 조사 후 출토된 유물은 지역 전시관에 배치되어, 산업과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가리봉동처럼 오랜 농경지가 산업단지로 바뀐 지역에서도 이런 방식의 조사와 보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성공 사례 02
은평구 불광동 — 예상을 뒤엎은 조선시대 생활유구
은평구 불광동 개발지에서 별다른 유구가 없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생활유구가 확인되었다. 결국 해당 유적은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개발계획이 조정되었고, 유물들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가리봉동의 잡종지와 연못 구역에서도 언제든 이런 예상치 못한 발견이 가능하다.
성공 사례 03
종로구 인사동 — 금속활자는 순서를 지킨 자에게 나타났다
종로구 인사동에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7개의 문화층과 16세기 금속활자가 출토되었다. 절차를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발견이었다. 가리봉동의 342필지 논 아래 7개의 문화층이 있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첫 걸음이 지표조사다.

10. 가리봉동 땅의 기억을 지켜야 할 이유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가리봉동에 사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신 집 아래에 1912년 논이 있었을 수 있다.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 공장 부지 아래에 연못이 있었을 수 있다. 그 연못가에서 아이들이 놀고, 어른들이 쉬었던 그 장면이 지금 지표 아래 퇴적층 속에 있다.
과거를 발굴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정체성 복원. 사라져가는 가리봉동의 이야기를 붙잡는 것이다. 둘째, 문화관광 가치. 구로공단의 노동 역사와 1912년 농경 역사를 결합하면 독특한 지역 콘텐츠가 된다. 셋째, 지속 가능한 도시. 개발과 보존의 균형을 찾는 것이 미래 도시 계획의 핵심이다.
정체성 복원
사라져가는 마을 이야기를 붙잡는 작업
문화관광 가치
공단 역사 + 농경 역사의 독특한 결합
도시 균형
개발과 보존이 함께하는 지속 가능한 미래

가리봉동 공단오거리 아스팔트 아래에
1912년 논물이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16개의 연못에서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내고
김씨와 박씨 가문이 나란히 벼를 심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지금 그 땅 어딘가에 있습니다.
공단이 들어서기 전에, 포클레인이 땅을 파기 전에
그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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