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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정릉동, 100년 전 그곳엔 무엇이 있었을까?

  • 2025년 5월 13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 기관 ·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지금 당신이 밟고 있는 그 땅,100년 전엔 누구의 것이었을까

1912년 정릉동 965필지가 품은 비밀 — 문화재 발굴 기관이 밝혀낸 서울 성북구의 잊혀진 기억

당신은 매일 이 땅을 걷는다.그런데 이 땅이 100년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단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는가?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 카페 골목, 아파트 단지, 버스 정류장이 익숙한 그 풍경. 하지만 1912년, 이 땅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 세상의 이야기가 문화재 발굴 기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읽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할 것이다.


목 차

1.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땅의 정체

2. 문화재 발굴 기관, 서울의 땅을 읽다

3. 965필지가 품은 숫자의 비밀

4. 논밭으로 가득했던 정릉의 들판

5. 집터와 무덤 사이 — 사람이 살아 숨 쉬던 대지

6. 사사지와 임야 — 종교와 산이 지킨 땅

7. 성씨 분포로 읽는 정릉의 뿌리

8. 국유지와 법인지가 말해주는 것

9. 문화재 지표조사가 현재에 던지는 질문

10. 발굴이 이어지는 서울, 성공 사례로 보다

11. 마무리 —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SECTION 01

1.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땅의 정체

정릉동을 걷다 보면 아무렇지 않다. 편의점이 있고, 마을버스가 지나가고,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이웃이 있다. 너무나 평범한 그 골목이 사실은 수백 년의 기억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 이 지명에는 이미 역사가 새겨져 있다. 정릉(貞陵)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비였던 신덕왕후의 능에서 비롯됐다. 조선 건국 직후 조성된 왕실의 무덤이 이 동네 이름으로 이어진 것이다. 단순한 주거 지역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왕조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1912년, 일제강점기 초기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의 기록이 최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의 분석을 통해 세상에 다시 나왔다. 이 기록에는 정릉동의 땅 한 필지 한 필지가 어떤 용도였는지, 누가 소유했는지가 빼곡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숫자들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지금 정릉동을 아는 사람도 전혀 상상하지 못할 만큼 낯설고 놀랍다.


SECTION 02

2. 문화재 발굴 기관, 서울의 땅을 읽다

문화재 발굴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삽으로 땅을 파는 장면을 상상한다.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발굴 이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이 있다.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속을 파기 전에 해당 지역의 역사적, 고고학적 가치를 먼저 평가하는 과정이다. 지표면에서 관찰 가능한 유물, 유구의 흔적을 수집하고, 과거 문헌 기록과 지도를 비교 분석하여 해당 지역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지를 판단한다. 이것이 선행되어야 본격적인 시굴조사, 표본조사, 그리고 최종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바로 이 과정에 집중하는 기관이다. 1912년 서울의 토지조사 문서를 구획별로 분석하고, 이를 현재의 도시지도와 겹쳐 읽어내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서울 25개 구 전체에 걸쳐 동 단위로 분류된 조사 결과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있으며, 성북구 정릉동 역시 이 방대한 조사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발굴 조사 기관 소개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100년의 땅을 읽는 기관

이 기관은 서울 전역을 대상으로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종로구·중구·성북구·강남구 등 25개 구에 걸친 지역별 문화유산 기초자료를 구축하고 있다. 발굴조사 비용, 법적 절차, 공사 일정 등 실무적 정보까지 제공하며 문화재 지표조사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기관의 작업 덕분에 우리는 정릉동 땅의 100년 전 모습을 꽤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그 데이터가 말해주는 내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다.



SECTION 03

3. 965필지가 품은 숫자의 비밀

1912년 정릉동의 토지조사 데이터를 열어보면 첫 줄부터 압도된다. 총 965필지, 면적 합계 1,102,067㎡. 지금 환산하면 약 110만 제곱미터, 축구장 150개를 넘는 넓이다.

965총 필지 수

1,102,067㎡총 면적

543필지밭 (568,838㎡)

214필지논 (377,459㎡)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더 풀어보면, 당시 정릉동이 얼마나 광활한 농촌 지대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지금 정릉동은 서울 도심과 맞닿은 주거지이자 대학가지만, 1912년의 정릉동은 논과 밭이 절반을 훌쩍 넘는 농업 중심의 마을이었다.

밭 543필지에 면적 568,838㎡. 논 214필지에 면적 377,459㎡. 이 두 지목만 합쳐도 전체 면적의 85%를 넘는다. 도심 한복판이 아닌, 산자락에 기댄 너른 농경지대였던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 우리가 정릉동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걷는 골목 아래, 100년 전에는 모내기 소리와 농부의 발걸음이 있었다. 땅은 기억한다."


SECTION 04

4. 논밭으로 가득했던 정릉의 들판

봄이면 논두렁에 물이 차오르고, 여름이면 초록 물결이 바람에 흔들리던 정릉의 들판. 지금은 상상조차 어렵지만, 이 풍경이 불과 100여 년 전의 현실이었다.

밭 543필지는 정릉동 전체 필지의 56%를 차지한다. 단순히 많은 게 아니라 압도적인 비중이다. 이 밭들에서는 콩, 팥, 보리, 무, 배추 같은 작물이 자랐을 것이고, 그 작물들이 마을 사람들의 밥상을 채웠을 것이다. 일 년 내내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다시 땅을 준비하는 순환이 이 마을의 리듬이었다.

논은 214필지, 377,459㎡. 밭보다 필지 수는 적지만 면적은 만만치 않다. 논은 기본적으로 물을 다루는 농업이라 지형이 평탄한 곳에 모여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정릉동 일대에는 정릉천이 흐르는데, 그 물길 주변으로 논이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봄날 정릉천 물을 논으로 끌어들이던 사람들의 손길이 이 숫자 뒤에 있다.

단순히 농사짓던 마을이라고 치부하기엔, 이 땅 위에 쌓인 이야기가 너무 두텁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들판은 새로운 색깔을 입었고, 그 색깔들이 정릉 사람들의 삶을 물들였다.



SECTION 05

5. 집터와 무덤 사이 — 사람이 살아 숨 쉬던 대지

논과 밭만 있었던 건 아니다. 거기에 사람이 살았다. 대지 172필지, 80,311㎡. 이 숫자는 당시 정릉동에 실제 주거지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172채의 집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172개의 필지에 걸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집 한 채 한 채에 가족이 있었고, 아이들이 뛰어놀았고, 어머니가 밥을 지었고, 노인이 툇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봤을 것이다. 온돌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밤, 새벽이 오면 논으로 나가던 아침. 그 모든 일상이 이 172필지 위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그 옆에는 무덤이 있었다. 5필지, 5,695㎡. 적은 필지 수지만 이것이 전하는 의미는 작지 않다. 마을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이웃과 가족을 가까운 곳에 묻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땅에서 공존하던 시대의 방식이었다. 무덤은 단순한 매장지가 아니라, 그 마을의 역사를 가장 오래 지켜온 증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무덤의 위치와 규모는 매우 중요한 정보다. 조선시대 무덤의 배치는 마을의 권력 구조, 종족 관계, 지역 사회의 계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릉동의 5필지 무덤 역시 당시 이 마을을 이끌었던 집안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


SECTION 06

6. 사사지와 임야 — 종교와 산이 지킨 땅

정릉동의 땅은 단순히 먹고 사는 공간만이 아니었다. 믿음의 공간도 있었다. 사사지(寺社地) 5필지, 9,864㎡. 사찰이나 종교 시설에 속했던 이 땅들은 당시 마을의 정신적 중심이었을 것이다.

종소리가 울리면 일을 멈추고 잠깐 고개를 들었을 사람들. 명절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모여 제를 올리던 공간. 가뭄이 들면 비를 빌러 가고, 아이가 아프면 기도를 드리러 가던 곳. 사사지는 단순한 종교 부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가 모이는 구심점이었다.

임야는 25필지, 56,929㎡. 정릉동 북쪽으로 북한산 자락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숫자는 너무나 당연하다. 산에서 나무를 해 오고, 계곡물을 길어 마시고, 겨울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숲. 임야는 생존의 자원이었고, 동시에 마을을 지키는 울타리였다.

잡종지 1필지, 2,968㎡는 다양한 용도로 쓰이던 공간이다. 창고가 됐다가, 임시 장터가 됐다가, 마을 사람들의 모임 장소가 됐던 그런 유연한 땅. 지금으로 치면 주민 공용 공간과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SECTION 07

7. 성씨 분포로 읽는 정릉의 뿌리

이제 진짜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땅들을 누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토지조사 기록에는 소유자의 성씨가 남아 있고, 그 분포를 통해 정릉동이 어떤 공동체였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성씨

필지 수

비고

김씨

155

최다 소유

손씨

131

2위

강씨

58


최씨

48


이씨

44


류씨

37


박씨

37


유씨

35


안씨

33


왕씨

33


임씨

31


윤씨

29


장씨

28


황씨

27


한씨

15


홍씨

14


조씨

12


김씨 155필지, 손씨 131필지. 이 두 성씨만 합쳐도 286필지로, 전체의 약 30%에 달한다. 이 말은 정릉동이 여러 성씨가 섞인 혼합 마을이라기보다는, 특정 집안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결속된 공동체였음을 시사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왕씨(33필지)의 존재다. 왕씨는 고려 왕조의 후손으로 알려진 성씨인데, 조선 건국 이후 억압받으면서도 경기도 일대에 꾸준히 거주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정릉동에 왕씨 33필지가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의 역사적 층위가 얼마나 복잡하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안씨(33필지)도 흥미롭다. 성북구 일대는 안동 권씨나 광주 안씨 등 조선시대부터 자리 잡은 명문가와 연관된 곳이 많다. 이 안씨들이 단순한 농민인지, 아니면 지역 유력 가문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33필지라는 규모는 분명 단순한 이주민 수준을 넘는다.

이 성씨들의 분포는 단순한 인구통계가 아니다. 마을 안에서 누가 중심이었고, 누가 주변부였는지, 어떤 네트워크로 서로를 묶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적 지도다.



SECTION 08

8. 국유지와 법인지가 말해주는 것

개인 성씨들의 땅 외에도 정릉동에는 특별한 소유 구조가 있었다. 국유지 84필지와 법인 소유(사찰 등) 32필지가 그것이다.

국유지 84필지는 전체의 약 9%에 해당한다. 이 땅들은 당시 조선 총독부 또는 조선 왕실이 직접 관리하던 토지였다. 정릉이라는 지명이 신덕왕후의 능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국유지들 중 상당수가 왕릉 인근의 금지 구역이었거나 왕실 소유 토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무려 600년 전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 땅 위에 새겨진 권력의 흔적이, 1912년의 지적도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법인 소유 32필지는 주로 사찰과 종교 단체가 보유한 땅이다. 이미 언급한 사사지 5필지와 일부 겹치거나 연관될 수 있는데, 이 종교 법인들이 단순한 예배 공간 외에도 상당한 농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사찰 경제의 기반이 1912년까지 살아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릉동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다. 국가 권력, 종교 세력, 지역 유력 성씨, 그리고 이름 없는 농민들이 한 땅 위에 복잡하게 얽혀 공존하던 공간이었다. 이 복잡한 구조야말로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내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SECTION 09

9. 문화재 지표조사가 현재에 던지는 질문

그렇다면 이 모든 조사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발굴하는 낭만적인 작업일까? 아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현재의 도시 개발과 직결된 실질적인 작업이다.

서울에서는 매년 수백 건의 재개발, 재건축 공사가 진행된다. 어떤 땅을 파기 전에 그 아래에 문화재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법적으로 의무화된 이유다. 건물을 부수고 땅을 파다가 고려시대 청자가 나오거나, 조선시대 성벽의 흔적이 드러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그때마다 공사가 중단되고, 전문가들이 투입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

정릉동의 경우, 1912년 기록에서 확인된 무덤 5필지, 사사지 5필지, 그리고 국유지 84필지의 위치를 현재 지도와 대조해보면, 지금도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땅이나 공원 부지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이 땅들 아래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물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이 작업을 지속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땅을 파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한다. 읽지 않고 파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를 잃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동네도 조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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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10

10. 발굴이 이어지는 서울, 성공 사례로 보다

이런 종류의 역사 조사와 문화재 발굴 작업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서울에서 이루어진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면 더욱 생생하게 와닿는다.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는 광화문 광장 복원 과정에서의 발굴이다. 2006년 광화문 광장 조성 공사를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하자, 조선시대 의정부와 육조거리의 유구가 차례로 나타났다. 공사는 일시 중단됐고, 2년간의 발굴조사를 거쳐 해당 유구들의 일부가 보존, 전시되는 방식으로 광장이 재설계됐다. 지금 광화문 광장 지하에는 조선의 행정 중심지가 그대로 잠들어 있다.

성공 사례

종로구 훈정동 — 사사지 한 필지가 열어준 역사의 문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가 분석한 종로구 훈정동의 경우, 1912년 기록에 남은 사사지 1필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해당 부지가 조선시대 특정 사찰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분석은 문화재 지표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어, 추후 해당 지역 재개발 시 정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근거로 인정받았다. 단 하나의 필지 기록이 역사를 지키는 방패가 된 사례다.

성북구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하월곡동 일대에서 진행된 재개발 예비 조사에서, 1912년 기록과 현재 지적도를 비교 분석한 결과 일부 구역이 조선시대 묘역 인근임이 확인됐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개발 업체는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제적으로 의뢰했고, 결과적으로 공사 지연 없이 문화재 보호와 개발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제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를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개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공사 중단을 방지하고, 나아가 역사를 브랜드로 활용하여 지역 가치를 높이는 경제적 효과도 만들어낸다.

정릉동 역시 마찬가지다. 이 지역이 가진 역사적 층위를 제대로 읽어내고, 그것을 보존하면서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특별한 동네가 될 수 있다.



SECTION 11

11. 마무리 —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1912년 정릉동의 땅을 소유했던 사람들. 김씨, 손씨, 강씨, 최씨, 이씨, 류씨, 박씨, 유씨, 안씨, 왕씨, 임씨, 윤씨, 장씨, 황씨, 한씨, 홍씨, 조씨.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궈낸 논밭, 그들이 지은 집, 그들이 기도를 올리던 사찰, 그들이 눕힌 무덤은 땅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 그 땅 위에 우리가 서 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서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다.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쌓인 사람들의 삶과 죽음, 믿음과 노동, 사랑과 이별이 층층이 쌓여 지금의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 층위를 읽어내는 것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그것을 파내는 것이 문화재 발굴이다.

오늘 정릉동 골목을 걷는다면, 잠깐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스팔트 아래, 콘크리트 아래, 그 깊은 곳에 김씨와 손씨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그들이 심은 씨앗 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 땅을 밟는 발걸음을 조금은 다르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지키는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몫이다.

땅은 말이 없다.하지만 기록은 말한다.그리고 우리가 그 기록을 읽는다면,이 도시는 비로소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오늘 당신이 이 글을 읽은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어쩌면, 1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누군가가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해달라고당신을 이 글로 이끈 것일지도.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기반 콘텐츠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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