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동, 100년 전 그곳엔 무엇이 있었을까?
- 서울 HI
- 5월 13일
- 2분 분량
서울 성북구의 조용한 동네, 정릉동.
지금은 대학가 근처의 골목, 아파트 단지, 그리고 숲과 함께 숨 쉬는 마을이지만
1912년 정릉동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이 땅의 숨은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부동산 시세도, 도시계획도, 건축 양식도 없던 시절.
오직 땅과 사람, 그리고 성씨들이 만든 역사.
자, 정릉동이라는 퍼즐을 하나씩 맞춰보자.

목차
1912년 정릉동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논밭이 가득했던 정릉의 들판
사람이 살아 숨 쉬던 대지와 무덤
종교와 유산, 사사지의 존재
임야와 잡종지, 산과 골짜기의 기록
성씨들의 분포로 본 정릉동의 ‘뿌리’
국유지와 사찰의 땅, 그 의미는?
정릉동의 역사 속에서 오늘을 보다
마무리하며 –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해시태그 정리
1. 1912년 정릉동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지금 정릉동은 카페가 줄지어 있는 골목과 등산객이 모이는 북한산 자락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1912년, 그 모습은 달랐다.
총 965필지.
면적만 무려 1,102,067㎡.
이 땅은 지금 우리가 아는 도심지가 아니었다.
사람은 적고, 논밭은 넓고, 산과 무덤과 절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자연과 사람의 공존’이었다.
2. 논밭이 가득했던 정릉의 들판
정릉동의 절반 이상은 농지였다.
논만 해도 214필지, 377,459㎡.
게다가 밭은 무려 543필지, 568,838㎡.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안 되지만, 정릉동은 ‘농사짓는 마을’이었다.
이 논과 밭은 주민들의 삶이자 생계였고, 그 위로 사계절이 흘러갔다.
그 너른 들판에 모내기를 하던 사람들,
여름 볕에 구슬땀을 흘리던 아이들.
모두 이 땅 위에 있었다.
3. 사람이 살아 숨 쉬던 대지와 무덤
1912년, 정릉동엔 172필지, 80,311㎡의 대지가 있었다.
즉, 누군가의 집이 있었고, 가족이 모여 살았다.
그리고 그 옆엔 무덤도 있었다.
5필지, 5,695㎡.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던 이 무덤은 단순한 흙더미가 아니다.
지역을 지킨 선조의 흔적이자, 기억의 공간이었다.
4. 종교와 유산, 사사지의 존재
1912년의 정릉동에는 사사지가 5필지, 9,864㎡ 있었다.
이 땅들은 사찰이나 종교재단이 소유했던 곳으로,
그 시대 사람들의 신앙과 정신이 스며 있는 자리였다.
도시화되기 전, 이런 사사지들은 마을의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절집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마을을 비추던 촛불,
그 모두가 정릉의 기억이다.
5. 임야와 잡종지, 산과 골짜기의 기록
정릉동의 북쪽은 북한산과 맞닿아 있다.
25필지, 56,929㎡의 임야는 이 지역이 ‘산동네’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잡종지 1필지, 2,968㎡는
말 그대로 다양한 용도, 예를 들어 도로, 창고, 공터 등으로 사용된 공간이다.
지금은 그 위에 아스팔트와 아파트가 놓여 있을지라도,
그 땅은 한때 소나무와 계곡물이 흐르던 자리였을 것이다.
6. 성씨들의 분포로 본 정릉동의 ‘뿌리’
누가 이 땅을 소유하고 살았을까?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한 성씨는 김씨(155필지).
그 뒤를 이어 손씨(131), 강씨(58), 최씨(48), 이씨(44), 류씨(37), 박씨(37), 유씨(35), 안씨(33), 왕씨(33), 임씨(31), 윤씨(29), 장씨(28), 황씨(27), 한씨(15), 홍씨(14), 조씨(12).
한 마을에 수십 명의 김씨와 손씨가 살았다는 건
그만큼 가족이나 종친 중심으로 촘촘히 얽혀 있었음을 말해준다.
정릉은 단순한 ‘동네’가 아니라, 성씨의 기억이 모인 공동체였다.
7. 국유지와 사찰의 땅, 그 의미는?
정릉동에는 84개 필지의 국유지가 있었고,
법인 소유(사찰 등)의 땅도 32필지나 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단순한 민가 중심의 마을이 아니라,
국가와 종교가 깊게 관여한 구조였음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정릉이라는 지명 자체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덕왕후의 능(정릉)에서 유래했음을 상기하면,
이 지역이 국가의 역사적 상징성과도 맞닿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8. 정릉동의 역사 속에서 오늘을 보다
오늘날 정릉동의 거리에서 우리는
카페, 빌라, 마을버스를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아래,
100년 전 땅의 기억이 살아 숨 쉰다.
누군가는 밭을 일구고,
누군가는 절에 들러 기도하고,
누군가는 산을 넘어 마을을 지켰다.
정릉동은 그들의 터전이었고, 지금도 누군가의 ‘집’이다.
9. 마무리하며 –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우리가 정릉동을 걷는다는 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길 위를 걷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김씨, 손씨, 강씨…
익명의 조상들이 남긴 발자국 위에 놓여 있다.
그 기억을 품고,
오늘 우리는 정릉을 다시 본다.
10. 해시태그 정리
Comentar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