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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주성동, 1912년의 땅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 2025년 9월 9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용산구 역사

용산 주성동, 37채의 집이 말해주는 것1912년 62필지가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

용산구 주성동 · 62필지 · 59,487㎡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지금의 용산 아파트 단지, 그 땅 아래에 단 37채의 집이 있었다면 믿어지나요?

수많은 빌딩과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서울 용산구 주성동. 지금 이 동네를 걷는다면 아무도 113년 전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1912년, 이 땅에는 단 37필지의 집터와 2기의 무덤, 그리고 드넓은 밭이 전부였습니다. 한 장의 토지 기록이 조용히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 소박한 마을은 어떻게 사라졌을까요. 그리고 그 땅 아래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지나치던 용산의 땅이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 100년 전 서울, 주성동의 얼굴을 상상해보자

  2. 37채의 집, 그리고 2기의 무덤이 전하는 삶과 죽음

  3. 땅의 용도, 땅의 주인 — 필지별 기록 속으로

  4. 사라진 성씨들, 남겨진 지명들

  5.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 2필지가 담은 역사

  6. 문화유산 발굴, 땅 아래 숨겨진 진실을 찾는 여정

  7.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 세 단계가 만드는 기적

  8. 진짜 성공 사례 — 발굴이 도시계획을 바꾼 순간들

  9. 당신의 땅에도 역사가 숨 쉬고 있다

  10. 마무리 — 이제 우리가 할 일은



SECTION 01

100년 전 서울, 주성동의 얼굴을 상상해보자

1912년, 서울은 아직 '경성'이라 불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용산은 지금처럼 군부대와 외국 대사관,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그 무렵의 주성동을 한번 그려볼까요. 골목 안쪽 초가집 몇 채, 집 뒤편 밭에서 호미질하는 사람, 마을 끝 산자락에 기대어 자리 잡은 두 기의 무덤. 이것이 1912년 주성동의 전부였습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주성동의 총 필지 수는 62필지, 전체 면적은 약 59,487㎡였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축구장 여섯 개를 겨우 합친 크기입니다. 지금의 거대한 용산 개발 구역과 비교하면 얼마나 작고 소박한 마을이었는지 실감이 납니다.

그러나 그 작은 땅 안에 사람들의 삶 전부가 담겨 있었습니다. 집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무덤이 있었고, 사당이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 노동과 신앙이 62필지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이런 토지 기록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숫자 안에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62총 필지 수

59,487㎡총 면적

37대지 (집터) 필지

20밭 필지 수

2분묘지 필지

2동척 소유 필지


SECTION 02

37채의 집, 그리고 2기의 무덤이 전하는 삶과 죽음

37필지의 대지, 약 13,785㎡. 이 땅 위에 집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대부분 초가지붕이거나 기와를 얹은 소박한 집 한 채였을 겁니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었을 것이고, 처마 아래 고추가 달려 있었을 것이며, 저녁이면 부엌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을 것입니다. 그 집들 하나하나에 가족이 살고 있었고, 계절마다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2필지, 2,168㎡의 분묘지. 집터보다 훨씬 작지만, 이 무덤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마을 가까이에 두고 살았습니다. 명절이면 성묘를 가고, 기일이면 제사를 지내며 조상과의 연을 이어갔습니다. 그 두 기의 무덤은 이 마을 어떤 가문의 뿌리였고, 이 땅과 사람이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분묘지 기록은 특히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 관재 흔적 등이 지표 아래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주성동의 2필지 분묘지는 향후 문화재 발굴 기관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지점 중 하나입니다.

또한 1필지의 사사지, 즉 사당 터가 있었다는 사실도 눈길을 끕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를 올리고 신앙을 나누던 이 공간에는 당시의 종교 생활과 공동체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발굴조사에서 사당 터는 제기류, 향로, 기와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SECTION 03

땅의 용도, 땅의 주인 — 필지별 기록 속으로

주성동 62필지 안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밭이었습니다. 20필지, 30,238㎡로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 경작지였습니다. 서울 한복판이 지금은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지만, 그 시절의 땅은 곧 생존이었습니다. 밭에서 채소를 기르고 곡식을 수확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지목

필지 수

면적

대지 (집터)

37필지

13,785㎡

전 (밭)

20필지

30,238㎡

분묘지 (무덤)

2필지

2,168㎡

임야 (산)

2필지

별도 기록

사사지 (사당터)

1필지

별도 기록

공유지 (마을 공동 땅)

1필지

별도 기록

이 표를 한눈에 보면 주성동이 얼마나 농경 중심의 생활 공간이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대지와 밭을 합치면 57필지로 전체의 92%에 달합니다. 나머지 5필지가 무덤, 산, 사당, 공유지로 나뉘어 있었으니, 이 작은 마을의 삶이 얼마나 알차고 촘촘하게 짜여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땅의 주인도 다양했습니다. 김씨가 17필지, 이씨가 12필지를 소유했고, 그 외 여러 성씨들이 필지를 나눠 가졌습니다. 공유지 1필지는 마을 공동체가 함께 관리하던 땅이었을 것입니다. 제사나 마을 행사, 두레 같은 공동 작업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겠죠. 이처럼 주성동은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숨 쉬던 살아있는 마을이었습니다.


SECTION 04

사라진 성씨들, 남겨진 지명들

지금 주성동 거리를 걷다 보면 김씨 댁이나 이씨네 밭 같은 이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1912년의 토지대장을 들여다보면, 이 땅 위에서 분명 살아 숨쉬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김씨 가문이 마을에서 가장 많은 17필지를 소유하며 이 동네의 중심을 잡았고, 이씨 가문이 12필지를 가지며 그 옆을 든든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이 땅을 일구고, 아이를 키우고, 조상을 모시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땅에서, 지도에서, 그리고 우리의 기억에서 조금씩 사라져 갔습니다. 도시화의 물결, 일제강점기의 혼란, 전쟁과 재개발. 그 모든 격랑 속에서 주성동의 김씨와 이씨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이 잊혀진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작업입니다. 땅 아래 남겨진 생활 도구, 기와 조각, 우물터, 집 기초석 하나하나에 그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사를 통해 그것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라진 사람들의 삶이 다시 역사로 기록됩니다.

지명이 기억을 지키는 방법이라면, 발굴은 기억을 복원하는 방법입니다. 주성동이라는 이름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처럼, 그 이름 아래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도 땅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그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예의이기도 합니다.

— ◆ —


SECTION 05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 2필지가 담은 역사

1912년 주성동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이름 하나가 등장합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줄여서 동척입니다. 이 회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이윤을 뽑아내던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 기관이었습니다. 조선 전역에서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며 토지를 잠식해 나가던 그 조직이, 주성동에도 2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적 맥락 — 동양척식주식회사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 정부와 민간 자본이 합작한 반관반민 기업으로, 토지 매입과 이민 장려, 금융 지원을 통해 조선의 경제를 일본에 종속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1912년은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된 직후로, 동척의 토지 취득이 급격히 확대되던 시기였습니다. 주성동의 2필지는 그 시대의 불길한 시작을 보여주는 작은 조각입니다.

2필지라는 숫자는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동척의 손에 넘어간 그 2필지가 이후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위에서 원래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문화재 발굴조사는 이런 식민지 역사의 흔적도 외면하지 않고 발굴하고 기록합니다. 아픈 역사일수록 더욱 정확하게 기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의 건물 기초 잔재, 당시 반입된 일본식 건축 자재, 이 시기 토지 경계를 표시하던 구조물 등이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가 역사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방식입니다.



SECTION 06

문화유산 발굴, 땅 아래 숨겨진 진실을 찾는 여정

서울 어디를 파도 문화재가 나온다는 말, 괜한 말이 아닙니다. 서울은 조선 시대 500년의 수도였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땅입니다. 주성동처럼 겉보기엔 흔한 동네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수백 년 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특히 용산 일대는 조선 시대 군사 요충지이자 한강 수운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단순한 생활 유물을 넘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군사·행정 시설의 흔적이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주성동의 62필지 기록은 그 가능성의 첫 번째 단서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한번 사라지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굴착 공사로 지층이 파괴되면,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유물과 유구는 복구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개발 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주성동의 재개발 압력이 높아질수록, 문화재 발굴 기관의 역할은 더욱 절실해집니다.


SECTION 07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 세 단계가 만드는 기적

문화재 조사는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이 단계들을 차례로 밟아갈 때, 땅속의 기억이 가장 온전하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STEP 01지표조사땅 표면과 주변 환경을 조사합니다. 역사 기록, 고지도, 이전 자료를 종합해 문화재 분포 가능성을 평가합니다.

STEP 02시굴조사일부 구간을 선별해 땅속을 파봅니다. 사업 면적의 10% 이내에서 유물·유구 존재 여부를 확인합니다.

STEP 03발굴조사유적이 확인되면 전면 발굴에 들어갑니다. 중요 유적은 사적이나 기념물로 지정 보존됩니다.

주성동의 2필지 분묘지와 1필지 사사지 기록은 지표조사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어느 지점에서 시굴조사를 먼저 실시해야 하는지, 어떤 유물을 기대할 수 있는지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시굴조사에서 유물이 나오면 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 단계가 차례로 이루어질 때, 주성동 땅 아래의 기억은 온전히 세상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서울시 문화재 조사 전문기관들은 도시 재개발, 도로 확장, 신축공사 전 이런 문화재 조사를 전문적으로 수행합니다. 특히 용산처럼 개발 압력이 높고 역사적 유산이 풍부한 지역일수록, 지표조사는 필수 중의 필수입니다.



SECTION 08

진짜 성공 사례 — 발굴이 도시계획을 바꾼 순간들

문화재 발굴이 단순한 학문적 작업을 넘어 실제 도시계획을 바꾼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 사례들은 주성동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성공 사례 01 — 재개발이 멈추고 문화유산이 살아난 순간

서울시 모 지역에서 재개발 전 지표조사를 실시하던 중 조선 초기의 가옥터와 우물, 생활도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조사를 통해 해당 지역의 일부가 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전환되었고, 전체 도시계획도 일부 수정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일이 늦어졌다고 불평했지만, 다른 누군가는 서울 한복판에서 조상의 흔적을 지켜냈다며 감동했습니다. 그 발굴이 없었다면 조선 초기 가옥 구조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구는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성공 사례 02 — 인사동 금속활자, 기록이 실물이 된 날

종로구 인사동 110번지 도시환경정비사업 발굴조사에서 조선 전기 16세기 층으로부터 한글·한자 혼용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 금속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발견이었습니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조선 전기 인쇄 기술과 과학 기기가 실물로 확인된 이 성과는, 주성동의 사사지와 분묘지 터에서도 유사한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성공 사례 03 — 한양도성 복원, 고지도와 발굴이 만나다

한양도성 발굴조사에서는 고지도와 현장 발굴 데이터를 함께 분석해 성곽, 옹성, 성문의 위치를 정밀하게 복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 참여 행사가 열려 시민들의 역사 이해도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발굴이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주성동의 역사 발굴도 이런 방식으로 지역 주민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SECTION 09

당신의 땅에도 역사가 숨 쉬고 있다

혹시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혹은 개발하려는 그 땅에도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주성동의 37필지 집터처럼, 어딘가에 누군가의 삶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채로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해보세요

그 밭은 조선시대 어떤 이의 생계를 책임졌을까요?

그 무덤은 어느 집안의 조상이었을까요?

그 사당은 어떤 인물을 기리고 있었을까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100년 전 누가 살았을까요?

우리가 확인하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영영 땅 속에 묻혀버릴지도 모릅니다. 반면 지표조사 하나가 그 이야기를 세상으로 불러낸다면, 그것은 단순한 조사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당신의 관심이 바로 그 시작점입니다.

주변에 재개발이나 공사 계획이 있다면 문화재 지표조사가 먼저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해 보세요. 국가유산청(khs.go.kr)과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에서 관련 정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민의 관심 하나하나가 역사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SECTION 10

마무리 —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서울의 땅은 그저 비싼 부동산으로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의 시간이 잠들어 있습니다. 1912년 주성동의 37채 집, 2기의 무덤, 1개의 사당, 그리고 동척의 손에 넘어간 2필지. 이 모든 기록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그 시간을 깨우는 일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함께하는 문화재 발굴 기관들은, 당신의 땅에 숨은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끌어올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관심을 갖는 것, 질문하는 것, 그리고 개발이 앞서가기 전에 조사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 그 작은 행동들이 쌓여 주성동의 기억이 지켜집니다. 김씨 가문의 집터가, 이씨 가문의 밭이, 그리고 이름 모를 두 기의 무덤이 역사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37채의 집이 사라진 자리에우리의 기억을 심자"

1912년 주성동의 집터에서 밥을 짓던 사람들, 무덤 앞에서 절을 올리던 가족들, 사당에서 제를 지내던 마을 사람들. 그들의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졌지만 땅속에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동척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 이 마을은 평화로운 농촌이었습니다. 김씨 가문의 17필지, 이씨 가문의 12필지. 그 이름들이 다시 불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삽이 내려지는 순간, 잊혀진 삶들이 다시 빛을 봅니다. 그 순간을 만드는 것은 기관이 아니라, 관심을 갖는 당신입니다.

주성동의 62필지는 오늘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그 땅의 이야기를 함께 꺼내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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