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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변화를 앞둔 1912년 용산구 원효로1가의 풍경

  • 2025년 8월 12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용산 역사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골목,


113년 전엔 논밭이었습니다


— 1912년 용산구 원효로1가 토지 기록과 일제의 그림자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당신은 지금 어디 서 있나요?



카페 앞 보도블록 위? 아파트 로비? 아니면 원효로 버스정류장?



그 발 아래, 불과 113년 전에는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 주인의 절반 이상은 일본인이었죠.



믿기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1912년 원효로1가의 토지대장을 함께 펼쳐봅시다.

133필지

1912년 원효로1가


총 필지 수

187,921㎡

전체 토지


총 면적

61필지

일본인 소유


토지 (전체 46%)

목 차

1.거대한 변화를 앞둔 1912년 원효로1가의 풍경

2.논과 밭, 그리고 삶의 터전

3.집과 도로가 그려낸 근대의 윤곽

4.사사지와 임야, 그리고 땅의 숨결

5.잡종지라는 이름의 빈 땅

6.땅의 주인들 — 이씨, 일본인, 법인, 그리고 국유지

7.변화의 서막 — 일본인 토지 소유의 확대

8.오늘날 발굴조사가 알려주는 과거의 진실

9.서울 문화유적 조사와 현대적 의의

10.결론 — 땅에 새겨진 기억


01

거대한 변화를 앞둔 1912년 원효로1가의 풍경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지하철 5호선이 달리는 그 땅 아래엔 아직 철도조차 없었고, 현대식 빌딩 대신 낮은 처마의 집들이 들판 사이사이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1912년, 이 동네의 총 면적은 133필지 187,921㎡. 지금의 아파트 단지 몇 개를 합쳐 놓은 규모입니다.

그런데 그 땅의 생김새가 지금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논이 있고 밭이 있었으며, 절 소유의 땅이 있었고, 산기슭의 임야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이미 근대화의 물결이 서서히 침투하고 있었죠. 도로 부지가 생기고, 대지가 조성되고, 낯선 이름의 주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원효로는 조선 말기부터 외국인 거류지로 지정된 특별한 땅이었습니다. 1884년 개시장 지정 이후 프랑스, 중국, 일본인들이 몰려들었고, 1900년에는 전차까지 개통됐습니다. 1912년의 토지 기록은 바로 그 혼란스러운 전환기의 한 장면을 정확하게 포착한 스냅샷입니다.



02

논과 밭, 그리고 삶의 터전

1912년 원효로1가의 토지 구성을 들여다보면, 이곳이 아직 농업 공간이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논이 8필지에 21,345㎡, 밭이 22필지에 32,843㎡. 합쳐서 약 54,188㎡, 전체 면적의 약 29%가 농경지였습니다.

논에서는 가을이면 황금빛 벼가 익어갔을 겁니다. 한반도 어느 논이든 풍경은 비슷했겠죠. 이른 새벽,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 피 뽑는 손들, 오후의 뙤약볕 아래 허리를 굽혀 모를 심는 사람들. 밭에서는 고추, 배추, 무 같은 채소들이 자라고, 어떤 밭에선 보리나 콩이 키를 높였을 겁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

전체 비중

8

21,345

11.4%

22

32,843

17.5%

대지

88

80,892

43.0%

도로

2

2,244

1.2%

사사지

2

4,856

2.6%

임야

4

37,960

20.2%

잡종지

7

7,778

4.1%

그런데 원효로1가의 논밭은 단순한 식량 생산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땅을 직접 일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생존의 전부였습니다. 땅이 있으면 밥이 있고, 밥이 있으면 아이들이 자랍니다. 그 단순하고 절실한 연결고리가 이 숫자들 뒤에 숨어 있습니다.


03

집과 도로가 그려낸 근대의 윤곽

133필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대지였습니다. 88필지, 80,892㎡로 전체의 43%. 이 수치는 원효로1가가 이미 주거 밀집 지역으로 변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농지 위에 집이 올라서고, 집들이 모이면 골목이 생기고, 골목이 연결되면 동네가 됩니다.

도로 부지 2필지, 2,244㎡는 숫자로는 작지만 의미는 작지 않습니다. 1900년 원효로에 전차가 개통된 이후, 이 일대는 서울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 교통 인프라를 갖춘 동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전차가 달리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상권이 형성됩니다. 1912년의 도로 부지는 바로 그 흐름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흔적입니다.

"길이 생기면 마을이 바뀝니다. 전차 노선 하나가 조용한 농촌 마을을 상업 지구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원효로가 바로 그 사례였습니다."



04

사사지와 임야, 그리고 땅의 숨결

2필지, 4,856㎡의 사사지(社寺地)는 절이나 종중 소유의 땅을 뜻합니다. 원효로라는 이름 자체가 신라 고승 원효대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이 일대는 불교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공간입니다. 또한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이 이 지역에 설립된 것에서 알 수 있듯, 1880년대부터 이미 다양한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임야는 4필지, 37,960㎡로 면적 비중이 약 20%에 달했습니다. 이 산림 지역은 도시화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자연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고, 산나물을 캐고, 비 오는 날엔 그늘이 되어주던 그 산. 지금 그 자리엔 무엇이 들어서 있는지, 상상해 보셨나요?


05

잡종지라는 이름의 빈 땅

잡종지 7필지, 7,778㎡.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잡종지는 논, 밭, 대지처럼 특정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땅을 말합니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용도 미확정 필지'쯤 됩니다.

그런데 이 빈 땅이야말로 시대의 전환점에서 가장 민감한 공간이었습니다. 누가 먼저 이 땅에 손을 뻗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되었으니까요. 상점이 들어설 수도, 일본인 숙소가 세워질 수도, 공장 창고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1912년의 잡종지는 이렇게 미래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팽팽한 가능성의 공간이었습니다.


06

땅의 주인들 — 이씨, 일본인, 법인, 그리고 국유지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이 133필지의 땅은 누가 갖고 있었을까요?

이씨 가문

14필지 소유, 조선인 최다 성씨

국유지

13필지, 조선총독부 관리

법인 소유

4필지, 단체·기관 소유

일본인 소유

61필지, 전체의 약 46%

이 숫자를 보고 나면, 원효로1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조선인 중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이씨 가문이 14필지인데, 일본인은 무려 61필지를 쥐고 있었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 필지의 약 46%입니다.

일본인 소유

46%

이씨 가문

10.5%

국유지

9.8%

법인·기타

3%


07

변화의 서막 — 일본인 토지 소유의 확대

일본인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땅을 갖게 됐을까요?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경계가 불분명하거나 서류가 없는 땅들이 국유지 혹은 타인 소유로 전환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인들은 자본을 앞세워 조선인의 땅을 조직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원효로 일대는 그 표적이 되기에 완벽한 조건이었습니다. 철도가 지나고 전차가 다녔으며, 서울역과 가까웠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용산 기지와 인접해 있었죠. 이 전략적 입지를 간파한 일본인들이 땅을 사들이기 시작한 건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역사적 사실: 1912년 원효로1가의 일본인 소유 필지 61개는 한일병합 불과 2년 만에 이루어진 수치입니다. 이후 1920~30년대에는 이 비율이 더 높아졌으며, 원효로 일대는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지 중 하나로 변모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효창동, 청파동, 원효로 일대에 일본식 목조 가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08

오늘날 발굴조사가 알려주는 과거의 진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땅은 기억을 지우지 않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당시의 생활 흔적이 지금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발굴조사는 단순히 흙을 파는 작업이 아닙니다. 1912년 토지대장에 기록된 논 자리를 발굴하면, 그 층위에서 벼 이삭의 흔적이나 농기구 파편이 나오기도 합니다. 대지 터에서는 기와 조각, 생활도기, 화덕 잔해가 출토되기도 하죠. 이런 유물들이 숫자에 불과했던 기록에 살과 피를 입혀줍니다.

🏺

원효로 일대 발굴 성과

용산구 일대 재개발 과정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생활 유물과 함께 일제강점기 초기의 건물 기초 흔적이 함께 발견된 사례가 있습니다. 두 시대의 지층이 겹쳐 있는 이 흔적들은 급격한 근대화가 이 지역을 어떻게 덮어씌웠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

지표조사가 막은 역사 소실

서울 도심 재개발 사업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행한 결과, 공사 착공 전에 조선시대 우물터와 담장 기초가 확인된 사례가 다수 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됐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역사적 증거들이, 지표조사 한 번으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09

서울 문화유적 조사와 현대적 의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진행하는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정밀발굴조사는 단순히 옛날 물건을 캐내는 작업이 아닙니다. 이 과정들은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권력이 어떻게 땅을 재편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를 복원하는 역사 재구성 프로젝트입니다.

특히 문화재 지표조사는 모든 발굴의 첫 단계로, 토지 표면의 유물 분포와 지형 변화를 분석해 발굴 필요성을 판단합니다. 이 단계를 생략하면 수백 년 된 유구가 공사 삽날에 아무런 기록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1912년 원효로1가의 논밭이 지금 어떤 건물 아래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모르는 역사도 발굴조사 없이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됩니다.

재개발·재건축·신축 공사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의뢰하는 것은 법적 의무이기도 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면적 이상의 개발 행위에는 반드시 사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절차는 번거로운 규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사적 자산을 지키는 안전장치입니다.

지표조사 의뢰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에 문의하면 절차와 비용을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내 땅 아래에 어떤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요?



10

결론 — 땅에 새겨진 기억

1912년 원효로1가. 이 작은 동네의 토지 기록 하나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논과 밭이 공존하던 농촌의 온기,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오던 긴장감, 그리고 일본인 토지 소유가 절반에 가까웠던 냉혹한 식민지 현실.

이 모든 게 133필지의 숫자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들이 다시 생생한 이야기로 살아나는 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덕분입니다.

우리가 도시를 개발하고,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새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그 땅 아래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도시만이 미래를 설계할 자격이 있으니까요.



내 토지, 공사 전에 꼭 확인하세요.

문화재 지표조사는 법적 의무이자 역사를 보존하는 첫걸음입니다.절차, 비용, 소요 기간 — 모든 궁금증을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답해드립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바로가기 →

🌿

그 땅은 단 한 번도아무것도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누군가 평생을 갈아 일군 밭이었고, 아이들이 뛰어놀던 들판이었고,빼앗기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지켜낸 조상의 땅이었습니다.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그게 우리가 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입니다.오늘 이 글을 다 읽은 당신은,이미 그 시작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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