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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용산구 이태원동에 묻힌 땅의 기억을 파헤치다

  • 2025년 9월 5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용산구 이태원 역사

이태원, 100년 전 그 땅의 진짜 얼굴460필지가 말하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모든 것

용산구 이태원동 · 460필지 · 700,049㎡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이태원, 지금은 세계의 거리지만 — 100년 전에는 누군가의 논이었고 밭이었으며 무덤이었다.

화려한 네온과 다양한 국적의 언어가 뒤섞인 이태원.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거리의 과거를 상상해본 적 있나요? 1912년, 이태원동은 460필지, 700,049㎡에 이르는 땅 위에 논과 밭, 조상들의 무덤이 펼쳐진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 안에는 일본인의 그림자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손길, 그리고 이씨·김씨·정씨 가문의 삶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무심코 지나치던 이태원의 땅이 전혀 다른 목소리로 당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 1912년, 이태원동의 숨겨진 지형

  2. 논, 밭, 무덤까지 — 잊혀진 땅의 쓰임새

  3. 누가 이 땅을 가졌는가 — 성씨별 소유 현황

  4.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5. 왜 이 자료가 지금 중요한가 —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

  6. 서울 문화재 지표조사의 실제 — 세 단계가 만드는 기적

  7. 성공 사례 — 발굴이 바꾼 도시의 기억들

  8.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문화유산의 가치

  9. 서울시 문화유산 조사, 어디에 맡겨야 할까

  10. 마무리 — 땅은 기억한다, 우리는 그것을 되살려야 한다



SECTION 01

1912년, 이태원동의 숨겨진 지형

이태원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세계 각국의 음식, 다국적 문화, 주말 밤의 인파. 지금의 이태원은 서울에서 가장 다채로운 거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1912년, 조선총독부가 전국 토지를 조사하면서 기록한 이태원동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완전히 뒤엎습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태원동은 총 460필지, 700,049㎡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었습니다. 지금의 축구장 약 98개를 합친 크기입니다. 그 넓은 땅 위에 빌딩도 도로도 없었습니다. 대신 밭이 있었고, 집들이 있었으며, 무덤이 있었고, 논이 찰랑였습니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행정 기록이 아닙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에게 이 데이터는 지표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예측하는 가장 정밀한 나침반입니다. 460필지의 용도와 소유자 기록 하나하나가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이 됩니다.

460총 필지 수

70만㎡총 면적

260밭 필지 수

171대지 필지 수

19분묘지 필지

79일본인·동척 필지


SECTION 02

논, 밭, 무덤까지 — 잊혀진 땅의 쓰임새

1912년 이태원동의 토지 기록을 들여다보면, 마치 시간의 층을 한 겹씩 파헤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각각의 지목이 당시 이 마을이 어떤 공간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260필지


563,949㎡


전체의 약 80%

대지 (집터)171필지


77,253㎡


주거 흔적

분묘지 (무덤)19필지


32,730㎡


조상의 잠든 곳

6필지


8,542㎡


한강 수계 연결

가장 압도적인 것은 밭입니다. 260필지, 563,949㎡. 이태원 전체 면적의 80%가 넘는 땅이 밭이었습니다. 지금 세계 각국의 레스토랑과 클럽이 줄지어 선 거리, 그 자리에 감자가 자라고 고추가 붉게 익어가던 가을이 있었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대비입니다.

171필지의 대지는 수십 채, 어쩌면 수백 채의 집들이 모여 있던 터전이었습니다. 골목마다 이야기가 있었고, 집집마다 다른 삶이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19필지, 32,730㎡의 분묘지. 이태원의 언덕 어딘가에 조상들의 무덤이 19곳이나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분묘지 기록은 특히 중요합니다.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 관재 흔적이 지표 아래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9필지의 무덤 터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지점 중 하나입니다. 또한 밭으로 사용되던 260필지의 광활한 경작지에서는 농경 층위와 수로 흔적, 생활 도구 파편이 출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도시라고 하면 고층 빌딩과 도로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그 땅 아래에 삶과 죽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SECTION 03

누가 이 땅을 가졌는가 — 성씨별 소유 현황

1912년 이태원동의 땅을 가장 많이 소유한 것은 어떤 가문이었을까요. 토지 기록에는 구체적인 성씨들이 등장합니다. 가장 많은 필지를 보유한 것은 이씨로 76필지, 그다음은 김씨 69필지, 정씨 37필지, 박씨 23필지 순이었습니다.

성씨

소유 필지 수

특징

이씨

76필지

최대 토지 보유 가문

김씨

69필지

두 번째 규모

정씨

37필지

세 번째 규모

박씨

23필지

네 번째 규모

양씨·노씨·장씨·주씨 등

각 다수

다층적 구성

일본인

43필지

식민지 토지 소유

동양척식주식회사

36필지

식민지 수탈 기관

이씨 76필지, 김씨 69필지. 이 두 가문이 이태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을 회의에서의 발언권, 공동 제사에서의 주도권, 혼사의 영향력. 땅의 크기가 곧 사회적 지위였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양씨, 노씨, 장씨, 주씨처럼 상대적으로 낯선 성씨들도 여럿 필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태원이 특정 씨족이 독점하는 마을이 아니라, 다양한 혈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룬 다층적 공동체였음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태원이 서울에서 가장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거리인 것과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성씨 기록은 출토된 유물의 소유자를 추적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이씨 가문의 76필지, 김씨 가문의 69필지에서 발굴되는 생활 도구, 비석, 도자기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특정 가족의 이야기를 품은 유산이 됩니다.

— ◆ —


SECTION 04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이태원동의 1912년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숫자들이 있습니다. 일본인 소유 토지 43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36필지. 합산하면 79필지, 전체 460필지의 17%에 달하는 땅이 이미 식민지 지배 세력의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역사적 맥락 — 동양척식주식회사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 정부와 민간 자본이 합작한 반관반민 기관으로, 조선의 토지를 헐값에 매입하거나 강제로 빼앗아 수익을 올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1912년은 토지조사사업이 본격 시작된 시기로, 동척의 이태원 진출은 이 지역 전체를 식민지 경제 구조 안에 편입시키는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36필지라는 숫자는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아니라 문화유산 침탈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79필지 위에서 원래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명분으로 땅이 넘어갔을까요. 지금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과정을 영영 잃어버리게 됩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바로 이 아픈 질문에 답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건물지의 잔재, 당시 사용된 건축 자재, 토지 경계를 표시하던 구조물들이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고 기록하는 것이 우리가 역사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방식입니다.


SECTION 05

왜 이 자료가 지금 중요한가 —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

1912년 이태원동의 토지 기록은 단지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이 아닙니다. 현재의 문화재 보호와 조사 방향을 결정짓는 핵심 열쇠입니다. 이 데이터를 알고 있는 문화재 발굴 기관은, 어디를 먼저 살펴야 하는지, 어떤 유물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사전에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태원은 지금도 빠르게 변화하는 지역입니다. 오래된 건물이 허물어지고 새 건축물이 들어서는 속도가 서울에서도 손꼽힐 만큼 빠릅니다. 그 과정에서 굴착 공사가 진행될 때마다, 19필지의 분묘지와 260필지의 밭, 그리고 171필지의 대지 아래에 잠든 기억들이 위협받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 공사에 앞서 전문 문화재 발굴 기관이 지표면을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표본조사(면적의 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 순으로 단계가 이어집니다. 이태원동처럼 복잡한 역사 기록을 가진 지역일수록, 지표조사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이태원의 사례처럼 땅 아래에 수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곳은 단순한 개발 부지가 아닌 보존과 기록의 대상으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단 하나의 기록이라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SECTION 06

서울 문화재 지표조사의 실제 — 세 단계가 만드는 기적

문화재 지표조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이태원동처럼 역사적으로 복잡한 지역에서 조사가 진행된다면, 어떤 순서로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까요.

첫 번째는 지표조사입니다. 땅 위에서 시작하는 이 단계에서는 역사 기록, 고지도,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자료를 종합 분석합니다. 지표면의 지형 변화, 옛 경계석 흔적, 건물 기초 돌출부 등을 눈으로 확인합니다. 이태원의 경우 19필지의 분묘지 위치와 171필지의 대지 분포가 이 단계의 핵심 참고 자료가 됩니다.

두 번째는 시굴조사입니다. 사업 면적의 10% 이내에서 좁은 트렌치를 파 토양 단면을 분석합니다. 유물이나 유구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단계로, 이태원의 밭과 대지 구역에서 토기 조각, 기와, 생활용품 파편이 나올 수 있습니다. 동척 소유 구역에서는 일제강점기 건물 기초가 출토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발굴조사입니다. 시굴에서 유적이 확인되면 전면 발굴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유적은 사적이나 기념물로 지정되어 영구 보존됩니다. 출토된 유물 중 가치 있는 것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기도 합니다. 이태원의 460필지 기록은 이 세 단계 전체를 이끄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SECTION 07

성공 사례 — 발굴이 바꾼 도시의 기억들

이태원과 비슷한 조건의 서울 지역에서 실제로 발굴이 이루어진 성공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 사례들은 이태원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미래입니다.

성공 사례 01 — 종로구 개발 부지, 고려시대 가마터 발견

종로구의 한 개발 예정 부지에서 지표조사 중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되면서 시굴조사로 전환되었습니다. 정밀 조사 결과 해당 지역이 고려에서 조선 초기에 걸친 도자기 가마터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개발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고, 문화재 보존을 전제로 한 재설계가 진행되었습니다. 지표조사 하나가 기록과 개발의 균형을 바로잡은 사례입니다.

성공 사례 02 — 인사동,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땅에서 나오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 금속유물이 쏟아졌습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철저히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이 발굴 이후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치가 재평가되었고, 주변 지역 보존 계획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태원의 분묘지 기록이 이와 유사한 발굴로 이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성공 사례 03 — 한남동 분묘 유존 지역, 시굴에서 제기류 출토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의 기록에 따르면, 용산구 한남동 일대에서 1912년 분묘지 기록을 근거로 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가 실제로 출토되었습니다. 이태원동의 19필지 분묘지 기록은 한남동 사례와 거의 동일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유사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SECTION 08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문화유산의 가치

문화유산은 단순한 유물이 아닙니다.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정서, 풍습이 담긴 살아있는 기록입니다. 1912년 이태원동의 이씨 가문이 일구던 밭, 김씨 가문의 집터, 정씨 가문의 조상이 잠든 분묘지. 이 모든 것이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정체성을 이루는 층위들입니다.

특히 지금의 이태원은 2022년의 참사로 깊은 상처를 입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 땅에 켜켜이 쌓인 삶과 죽음의 기억, 기쁨과 슬픔의 이야기를 온전히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의 가장 깊은 층을 향한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도시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는 서울에서, 단 하나의 기록이라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태원의 460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SECTION 09

서울시 문화유산 조사, 어디에 맡겨야 할까

개발을 앞두고 있는 땅이 있다면, 그 땅에도 이태원과 같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정확하고 정밀한 문화유산 조사를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전문 문화재 발굴 기관이 필요합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전문 문화재 발굴 기관

1

서울 전 지역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정밀발굴조사 수행 가능

2

허가·보고·보존 등 국가유산청 관련 행정 절차 일괄 대행

3

1912년 토지대장 등 역사 기록 분석을 통한 사전 예측 조사

4

지역사 조사, 전시 콘텐츠 제작 등 발굴 이후 활용 지원

5

seoulheritage.org에서 서울 지역 발굴조사 기록 및 정보 확인 가능

개발을 앞두고 있다면, 먼저 이태원의 기록을 떠올리세요. 지금의 당신 땅도, 과거에는 누군가의 터전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확인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영 사라집니다.



SECTION 10

마무리 — 땅은 기억한다, 우리는 그것을 되살려야 한다

서울은 새로운 도시가 아닙니다. 서울은 기억의 도시입니다. 지금의 이태원도 무언가를 허물고 새롭게 세운 곳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죽음, 애환과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입니다.

1912년 이씨 가문이 일구던 76필지의 밭, 김씨 가문이 살던 69필지의 집터, 19필지의 분묘지에 잠든 이름 모를 조상들. 그리고 동척과 일본인의 손에 넘어간 79필지 위의 아픈 역사. 이 모든 것이 이태원이라는 땅의 진짜 얼굴입니다.

그 땅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우리는 지표조사를 하고 발굴조사를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며, 잊혀진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이고, 현재와 미래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태원의 460필지는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땅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냐고.



"땅은 기억한다우리는 그것을 되살려야 한다"

460필지의 기록 안에 이태원의 진짜 얼굴이 있습니다. 이씨 가문의 논밭, 김씨 가문의 집터, 정씨 집안 조상이 잠든 무덤. 동척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 이 땅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 있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삶들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는 작업입니다.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이 세 단계가 쌓이면 잊혀진 이야기가 역사가 됩니다.

관심 하나, 질문 하나가 그 시작입니다. 당신이 밟는 땅의 역사를 묻는 것. 그것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태원의 460필지는 오늘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그 땅의 이야기를 함께 꺼내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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