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한강로, 땅속에 잠긴 기억을 꺼내다
- 서울 HI
- 10월 5일
- 4분 분량
목차
강렬한 질문으로 시작: 왜 지금 1912년 한강로인가
1912년 한강로: 숫자로 본 땅의 구성
당시 도시 풍경과 사람들의 삶
문화유산 조사의 출발: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한강로 땅속에 남긴 기록: 의미와 가능성
성공 사례 이야기: 인근 지역 조사로 본 가능성
오늘의 한강로가 마주한 발굴 과제
맺음말: 땅에서 꺼낸 기억이 도시를 바꾼다
참고·출처

1. 강렬한 질문으로 시작: 왜 지금 1912년 한강로인가
“지금 걸어다니는 이 길 아래, 100여 년 전 누군가의 삶이 살아 있을까?”
그 질문이 내 심장을 끌어당겼다.
서울의 한복판을 걷다가도 느끼지 못하는 땅속의 이야기들이 있다.
바로 1912년 용산구 한강로라는 구획,
그곳은 단순한 과거의 땅이 아니라
수많은 도시의 기억과 문화유산의 씨앗이 묻힌 장소다.
나는 이 물음을 시작으로,
숫자로 드러난 땅 구조와
문화유산 조사의 방식을 엮어
한강로의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복원하려 한다.
2. 1912년 한강로: 숫자로 본 땅의 구성
먼저, 이곳 땅의 구성을 보자.
1912년 당시 용산구 한강로는 총 16필지, 면적은 4,752,061㎡였다.
그 안을 쪼개 보면 이렇게 정리가 된다:
대지: 9필지, 면적 2,838,095㎡
잡종지: 2필지, 면적 402,216㎡
연못(지소): 1필지, 면적 7,190㎡
철도용지: 4필지, 면적 1,504,558㎡
국유지: 총 15필지
프랑스인 소유지: 1필지
이 숫자들은 단지 통계가 아니다.
한강로라는 공간이 어떻게 분할되었고,
누가 어떤 목적으로 땅을 썼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다.
예컨대,
철도용지가 1,504,558㎡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이미 그 시점에 철도 시설이 공간을 많이 점유하고 있었다는 뜻이고,
국유지 필지가 15개라는 건
정부 혹은 행정 권력이 땅을 많이 확보했음을 시사한다.
프랑스인이 1필지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외국인 거주 내지 외국인 활동이
한강로 일대에 이미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 땅은 단지 한국인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통계만으로는 사람이 살았던 모습,
길거리 풍경, 건축물의 흔적까지는 파악할 수 없다.
그걸 보완하는 것이 “문화유산 조사”의 역할이다.
3. 당시 도시 풍경과 사람들의 삶
숫자가 보여주지 않는 삶,
당시 한강로의 풍경을 상상해 보자.
한강로는 한강 강변과 맞닿아 있어
홍수나 침수가 잦은 땅이었다.
그래서 낮은 지역에는 인가나 건축이 드물었고,
대지는 상대적으로 고지나 안정된 곳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도성 쪽에서는 높은 땅 쪽이 선호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초기, 용산은 군사·철도 중심지로 변모하던 지역이다.
이미 군사 시설과 철도 시설이 이 지역을 잠식하고 있었고,
그 영향은 토지 이용 배치에도 반영되었다.
프랑스인이 땅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종교적 활동 혹은 외국인 거주지 개발과 연결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용산 주변엔 선교 활동, 외국인 거류지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또 인접 구역 조사들을 보면,
1912년 양평동 등에선 토지와 삶의 흔적이 조사 대상으로 떠올랐고,
그런 맥락에서 한강로도 충분히 문화재 조사의 후보지가 될 수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홈페이지가 1912년 지역 조사를 다수 다룸)
4. 문화유산 조사의 출발: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이제 문화유산 조사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지표조사
먼저 땅 위에서 가능한 유적 흔적, 지층 변화, 지형 패턴 등을 살핀다.
이 단계에서는 땅에 금석문, 돌무더기, 기와 조각 등이 보이면 메모하고 지도로 기록한다.
지표조사는 유적이 있는 가능성을 판단하는 초기 작업이다.
시굴조사
지표조사 결과 유의미한 지점이 확인되면
작은 구멍들을 여러 곳 뚫어
토층 구조, 유물 존재 여부, 층위의 변동 등을 확인한다.
즉 땅속 구조를 일부 노출하는 절차다.
이 조사 후 유물이 존재하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문화재청 허가가 필요하다.
발굴조사
땅속에 묻힌 유물·유구(遺構)를 체계적으로 발굴하는 단계다.
학술적 목적, 보존 방안, 개발 구제 목적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발굴은 땅을 허무는 것이므로
가능하면 최소 범위로 진행하는 게 원칙이다.
이 세 단계는 문화재 조사 흐름의 기본이며,
한강로를 대상으로 한다면
지표 → 시굴 → 발굴 순서로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5. 한강로 땅속에 남긴 기록: 의미와 가능성
그렇다면 1912년 한강로는 문화유산 조사 대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닐까?
철도용지 분포
이미 통계에서 철도용지가 비중 있게 드러난 만큼,
철도 관련 유구(선로, 침목, 철도 인프라 흔적 등)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국유지와 공공 기능 부지
국유지 15필지라는 것은
도로나 행정시설, 공공 시설 등이 땅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음을 암시한다.
공공유구의 가능성이 있다.
프랑스인 소유지
외국인 거주지 혹은 종교 시설 가능성도 열려 있다.
철거 혹은 도시화 과정에서 흔적이 사라졌더라도
지하층에 기초 유구가 남아 있을 수 있다.
대지와 잡종지
주거지 가능성이 높은 대지,
잡종지는 소규모 창고나 부속 공간 등이었을 것이다.
과거 주민의 기와 조각, 자기 조각, 축조 자재 파편 등이 나올 가능성 있다.
지하 수로 또는 연못 유구
연못 한 필지(7,190㎡)의 존재는
배수 시설, 저류지, 수로 유구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처럼 한강로 땅속은 복합적이다.
철도 인프라와 주거 공간, 외국인 거주, 공공기능 등이 뒤섞여
지층에는 시간이 쌓인 복합적인 흔적이 있을 것이다.
6. 성공 사례 이야기: 인근 지역 조사로 본 가능성
한강로 바로 옆 혹은 인근 지역에서 이미 조사를 거쳐
성과가 확인된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한강로의 미래 가능성도 뚜렷해진다.
예를 들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는
1912년 기준 서울 각 구역—영등포, 동작 등—의 토지와 삶의 흔적을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등의 방식으로 복원한 바 있다.
또 한양도성 서울시장 공관 부지 안에서는
한양도성의 뒷채움 구조를 확인하는 발굴조사가 시행된 사례가 있다.
이처럼 중심 지역에서 지층 구조가 드러나기도 한다.
용산 일대 자체에도
철도관사 골목, 백빈 건널목, 철도병원 등
근대 유산이 현재에도 남아 있으며
이 지역을 걷는 투어 코스가 구성되어 있다.
또 용산역사박물관은
1916년부터 조성된 이태원 공동묘지와 연결된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도시 한가운데 땅속 기록”이
지금도 발굴·조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7. 오늘의 한강로가 마주한 발굴 과제
한강로 땅속을 조사하려면 다음 과제들을 넘어서야 한다:
현대 건축물과 기반시설 간섭
지금의 도로, 상하수도, 지하 터널 등이 땅속 깊숙이 있다.
이 구조물들과 충돌하지 않게 조사를 설계해야 한다.
토지 소유권과 이용 변화
수십 차례 지번 변경, 소유권 이전, 도시 재개발이 이뤄졌을 것이다.
옛 필지 지도와 현대 지도를 겹쳐 정밀하게 맞춰야 한다.
문화재청 허가 및 행정 절차
발굴조사는 허가받아야 하고,
시굴조사 단계부터 자료 제출, 보존 계획 등이 제안되어야 한다.
자원과 인력 확보
고고학자, 보존처리 전문가, 사진 전문가, 측량 전문가 등이 필요하다.
보존과 활용 계획 설계
유물이 출토되면 어떻게 보존하고 전시·활용할 것인지
문서 설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성과가 크다.
한강로라는 중심지에서 발견되는 유적은
서울 중추부의 역사 풍경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8. 맺음말: 땅에서 꺼낸 기억이 도시를 바꾼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한강로 아래,
1912년의 주거지, 철도용지, 국유지, 외국인 소유지 등이 섞여
수많은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숫자로만 존재하던 필지와 면적은
문화유산 조사와 결합할 때
살아 있는 풍경으로 복원될 수 있다.
어느 날 지표조사를 통해
기와 조각 하나가 발견되고,
그 뒤 시굴을 거쳐
철도 침목 유구가 드러나는 순간,
한강로는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기억의 축’이 된다.
20대, 30대 너도 혹은 나도
이 이야기를 그대로 읽고
한강로 골목을 걸을 때면
지하에서 전해지는 도시의 울림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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