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청파동3가, 땅 위의 기록과 문화유산 발굴의 의미
- 2025년 10월 2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문화재 지표조사서울 문화유산 발굴
땅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1912년 청파동3가로 읽는문화재 지표조사 이야기
"135필지, 168,063㎡. 조선의 마을과 일제의 침투가 한 땅 위에서 충돌하던 청파동3가. 그 기록이 오늘의 문화재 발굴 현장을 설계하는 가장 정밀한 지도가 된다."
출처: seoulheritage.org키워드: 문화재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 서울문화재발굴기관
목 차
땅이 기억하는 100년 전 청파동3가 — 왜 이 기록인가
135필지의 풍경 — 전체 규모와 도시적 맥락
109필지의 집터가 말해주는 것 — 사람들의 삶
임야와 밭, 자연과 농업이 공존한 공간
잡종지의 쓰임새 — 변화를 예고한 과도기의 땅
국유지 29필지 — 행정 권력이 새긴 흔적
토지 소유 구조 — 김씨·이씨와 외부 세력의 충돌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침투 — 식민지 경제의 민낯
법인 소유와 일본인 30필지 — 근대화와 강점의 교차점
1912년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주는 단서
서울 발굴 성공 사례 — 과거를 만난 순간들
도시 개발과 역사 보존의 균형 — 청파동이 던지는 질문
땅의 기억을 미래로 잇다 — 맺음말
지금 청파동3가의 어느 골목을 걷고 있다면, 그 발밑 어딘가에 100년 전 조선 사람의 집터와 일제의 침략이 같은 층위에 겹쳐 잠들어 있다.
이 말이 과장처럼 들린다면, 숫자를 한번 보자. 1912년 용산구 청파동3가. 총 135필지, 168,063㎡. 이 숫자들 안에는 조선 후기 마을 공동체의 온기와 일제가 강제로 편입한 경제 구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수탈, 그리고 30필지에 달하는 일본인 소유지가 한꺼번에 담겨 있다. 단지 오래된 토지 대장이 아니다. 이것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지도이며, 오늘의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다.

SECTION 01땅이 기억하는 100년 전 청파동3가 — 왜 이 기록인가
역사는 성곽이나 궁궐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남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흔적은 땅속과 토지 기록 안에 조용히 숨어 있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3가는 지금은 대학과 주택가가 뒤섞인 활기찬 동네지만,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 시절 청파동3가는 조선 후기의 마을 공동체가 일제강점기의 새로운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하던 공간이었다. 김씨와 이씨 가문이 대를 이어 일군 땅 위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들이 하나씩 발을 들여놓고 있었고, 국유지가 늘어나며 총독부의 행정 권력이 마을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이 복잡한 역사의 교차점을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시각으로 다시 읽으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뿌리가 훨씬 생생하게 보인다.
"땅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100년 전 청파동3가의 기록은 잊혀진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있다." — seoulheritage.org
SECTION 02135필지의 풍경 — 전체 규모와 도시적 맥락
1912년 청파동3가의 전체 규모는 135필지, 168,063㎡였다. 이웃한 한남동의 750필지나 한강로의 16필지와 비교하면 중간 규모지만, 구성의 복잡함은 단연 두드러진다. 대지, 밭, 임야, 잡종지, 국유지, 한국인 소유, 동척 소유, 일본인 소유까지 거의 모든 유형의 토지가 이 좁은 공간에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135필지전체 필지
168,063㎡
109필지대지(집터)
52,866㎡
20필지밭
67,643㎡
29필지국유지
행정·공공 기능
4필지잡종지
38,284㎡
2필지임야
9,269㎡
1912년이라는 시점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해는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때로, 조선의 땅이 공식적으로 측량되고 소유권이 재편되기 시작한 시기다. 그 결과물이 지금 우리가 들여다보는 이 토지 기록이다. 서울은 이미 근대 도시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용산 일대는 철도와 군사 시설이 집중되면서 가장 격렬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청파동3가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농업과 주거, 행정과 군사적 목적이 한데 얽힌 독특한 구조를 띠게 되었다.

SECTION 03109필지의 집터가 말해주는 것 — 사람들의 삶
135필지 중 109필지가 대지였다. 52,866㎡의 집터. 이 숫자는 청파동3가가 압도적으로 주거 중심의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아이들이 좁은 골목을 뛰어다니고, 저녁마다 아궁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이웃끼리 마당 너머로 안부를 나누던 풍경이 이 109필지 안에 담겨 있었다.
문화재 발굴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는 것이 바로 집터 유구다. 기와 조각, 토기와 도자기 파편, 온돌과 아궁이 구조, 우물 흔적, 소형 저장 구덩이 같은 것들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복원해 준다. 109필지의 대지가 몰려 있었다는 것은 이 구역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할 때 생활 유구의 밀도가 매우 높을 것임을 예고한다. 특히 한 가문이 여러 필지를 연속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구간에서는 수대에 걸친 생활의 켜가 압축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SECTION 04임야와 밭, 자연과 농업이 공존한 공간
임야는 2필지, 9,269㎡였다. 면적으로는 크지 않지만, 이 작은 산자락과 숲은 마을의 울타리 역할을 했을 것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산줄기의 일부였을 수도 있고, 마을 사람들이 땔감을 구하거나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임야 구역은 분묘 유구나 제의 관련 시설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은 구역으로 분류된다.
밭은 20필지, 67,643㎡로 전체 면적의 40%를 넘긴다. 집터(52,866㎡)보다 오히려 넓다. 이것은 청파동3가 주민들이 여전히 농업을 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밭 구역을 살필 때는 탄화된 곡물 씨앗, 농기구 파편, 밭두렁의 경계 흔적 같은 것들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넓은 밭과 촘촘한 집터의 경계선이 바로 생활 유구가 집중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간이다.
청파동3가의 밭이 집터보다 넓었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도시와 농촌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반농반도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밭과 대지의 경계선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트렌치 배치의 첫 번째 기준이 된다. 이 경계 구간에서 생활 유구의 밀도가 가장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SECTION 05잡종지의 쓰임새 — 변화를 예고한 과도기의 땅
잡종지 4필지, 38,284㎡. 이 땅은 그 이름처럼 용도가 섞인 공간이었다. 군용 창고, 도로 예정지, 임시 집하장 같은 다양한 목적으로 쓰였을 것이다. 주거도 농업도 아닌 이 과도기적 공간은 곧 다가올 도시 개발의 전초 단계를 예고한다.
실제로 서울에서 발굴된 사례들을 보면, 잡종지로 분류된 구역에서 일본군 관련 도로 흔적이나 근대 시설의 기초 유구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소유 변천이 잦고 용도가 수시로 바뀐 이런 땅은 지표 유구가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을 수 있지만, 경계부나 외곽에 잔존 유구가 압축되어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시굴조사에서 트렌치 배치를 세밀하게 설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SECTION 06국유지 29필지 — 행정 권력이 새긴 흔적
청파동3가에는 29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나라 소유의 땅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국유지는 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며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핵심 도구였다. 도로, 행정 시설, 군사 목적의 부지 등이 이 29필지 안에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발굴조사에서 국유지 구역을 살필 때는 돌축대, 관청 건물의 기초 터, 행정 시설의 잔해 같은 것들이 단서가 된다. 근대 건축 방식과 조선 전통 건축 방식이 혼재하는 층위가 나타날 수 있고, 이 두 층위의 경계를 정밀하게 구분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29필지나 되는 국유지가 한 동네 안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총독부의 관리 아래 얼마나 철저하게 재편되었는지를 말해준다.

SECTION 07토지 소유 구조 — 김씨·이씨와 외부 세력의 충돌
땅 주인의 이름을 보면 그 동네의 역사가 보인다. 1912년 청파동3가에서는 김씨가 17필지, 이씨가 12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두 성씨가 이 동네 한국인 소유 토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힘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인 소유17필지김씨 가문
토착 공동체
한국인 소유12필지이씨 가문
토착 공동체
국유지29필지총독부 관리
행정·공공
일본인 소유30필지거주·상업
군사적 용도
동척 소유5필지동양척식
주식회사
법인 소유1필지교회·학교·기업
근대화 징후
그러나 이 숫자들을 함께 놓고 보면, 이미 1912년에 청파동3가의 토지 지배력이 심각하게 외부 세력에게 넘어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국유지 29필지에 일본인 소유 30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5필지까지 더하면 전체 135필지 중 절반 가까이가 조선 사람 개인의 통제 밖에 있었다. 이 토지 소유 구조의 변화가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가지는 의미는 분명하다. 소유자가 바뀌는 시점마다 땅의 이용 방식이 달라지고, 그 변화가 지층에 켜켜이 쌓이기 때문이다.
SECTION 08동양척식주식회사의 침투 — 식민지 경제의 민낯
역사적 맥락 —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란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 제국이 조선의 토지를 체계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국책회사다. 조선 전역에서 토지를 매입하거나 강제로 취득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그 소유 토지는 일본인 농업 이민자에게 재분배되거나 개발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청파동3가에 동척 소유지 5필지가 확인된다는 것은, 이 동네가 단순한 마을을 넘어 식민지 경제 구조에 편입된 공간이었음을 증명한다.
동척이 소유한 5필지는 숫자로는 작아 보이지만 상징적으로는 매우 크다. 동척의 토지는 보통 수익성이 높거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청파동3가 안에서 이 5필지가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고지도와 GIS 분석으로 특정한다면, 그 구역에서 일제강점기 관련 건축 잔해나 근대 토목 요소의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토지 소유 이력 추적이 단순한 역사 공부를 넘어 실질적인 발굴 전략의 일부가 되는 이유다.
SECTION 09법인 소유와 일본인 30필지 — 근대화와 강점의 교차점
법인 소유의 토지가 1필지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당시 법인 명의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교회, 학교,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던 근대적 기업이 이 땅의 주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청파동3가가 전통적인 농촌 마을의 틀을 넘어서 이미 근대적 변화가 스며들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가장 눈길을 끄는 수치는 일본인 소유 30필지다. 전체 135필지 중 30필지, 비율로는 22%에 달한다. 이는 청파동3가가 한국인과 일본인이 뒤섞인 공간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인 소유지는 주거뿐 아니라 상업과 군사적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이 30필지의 분포를 지도 위에서 확인하면, 일제강점기 당시 청파동3가 안에서 일본인 거류 지역과 한국인 거주 지역이 어떻게 나뉘어 있었는지가 그려진다. 그 경계선은 지표조사에서 건축 방식의 차이와 사용된 재료의 차이로 확인될 수 있다.

SECTION 101912년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주는 단서
1912년 토지 기록은 일종의 역사적 지표 자료다. 이 데이터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만나면, 어디를 먼저 살펴야 하는지, 어떤 유구가 나올 수 있는지, 트렌치를 어느 지점에 배치해야 하는지가 훨씬 정밀하게 설계된다. 청파동3가의 경우를 예로 들면 이렇다.
109필지의 대지가 밀집한 구역에서는 생활 유구의 밀도가 높을 것으로 예측된다. 기와 조각, 토기 파편, 온돌 구조, 우물 흔적이 집중될 구간이다. 밭과 대지의 경계선은 시굴조사의 첫 번째 트렌치 배치 기준이 된다. 국유지 29필지 구역에서는 근대 행정 시설의 기초 유구나 도로 관련 구조물의 흔적이 나올 수 있다. 동척 소유지와 일본인 소유 30필지의 분포 구역에서는 일제강점기 건축 잔해와 근대 토목 요소가 단서가 된다. 임야 2필지의 주변은 분묘 유구와 제의 관련 시설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구역이다. 이 모든 예측이 1912년 토지 기록 한 장에서 나온다. 이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역사 자료 분석이 단순한 배경 조사가 아니라 발굴 전략의 핵심인 이유다.
SECTION 11서울 발굴 성공 사례 — 과거를 만난 순간들
서울역 인근 발굴 — 일제강점기 철도 유산의 재발견
서울역 고가도로 철거 과정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는 일제강점기 철도 관련 시설의 잔해가 확인되었다. 당시 문화재 발굴 기관이 사전 지표조사를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에 조사 범위가 빠르게 특정되었고, 발굴 결과는 서울 근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근대 인프라 구역에서도 지표조사를 통해 의미 있는 문화유산을 발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로 인근 개발지 — 조선 후기 생활유산의 발견
종로 인근 개발 현장에서는 조선 후기의 우물과 생활 도구가 출토되었다. 발굴 이전에 실시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구역이 조선 후기 주거 밀집 지역이었음이 확인되었고, 시굴조사를 통해 트렌치 배치가 최적화된 덕분에 조사 기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출토된 유물은 개발 부지 내 역사 전시 공간에 통합되어 지역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 두 사례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 초기에 충실한 지표조사를 수행한 현장은 발굴 결과가 더 정밀하고, 공사 지연 없이 인허가가 진행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역사를 자산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청파동3가의 복잡한 토지 구조는, 이런 사례들이 이 동네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을 말해준다.

SECTION 12도시 개발과 역사 보존의 균형 — 청파동이 던지는 질문
오늘날 서울은 쉬지 않고 개발되고 있다. 청파동3가도 마찬가지다. 낡은 건물이 허물어지고, 새 건물이 올라가고, 골목이 넓어진다. 그 과정에서 100년 전의 흔적은 무방비 상태로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문화재 지표조사 없이 공사가 시작된다면, 109필지의 집터가 남긴 기와 조각과 생활 유구, 동척과 일본인 소유지가 남긴 근대의 흔적이 기록도 없이 흙더미와 함께 버려질 수 있다.
개발이 놓치는 것
지표조사 없이 공사를 시작하면 공사 중 유구 발견으로 전면 중단될 수 있고, 복구 비용과 일정 손실이 초기 지표조사 비용의 수십 배에 달한다. 역사 자료도, 학술 기록도 남지 않는다.
지표조사가 만드는 것
초기에 조사를 마친 현장은 인허가가 빠르고, 설계 변경의 자유도가 넓으며, 발굴 결과를 역사 해설 공간이나 브랜드 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 도시의 품격이 달라진다.
청파동3가의 사례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서울 어딘가에서 진행되는 개발 현장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 땅이 품은 과거를 먼저 살피는 것, 그것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길이며, 동시에 가장 현명한 개발의 방식이다.
SECTION 13땅의 기억을 미래로 잇다 — 맺음말
1912년 용산구 청파동3가의 기록은 단순한 토지 대장이 아니다. 그 안에는 김씨와 이씨 가문이 일군 조선 마을의 온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30필지가 파고든 식민지의 냉기, 그리고 법인 소유지와 잡종지 사이에서 꿈틀거리던 근대화의 진동이 함께 담겨 있다.
109필지의 집터는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이고, 20필지의 밭은 먹고살았다는 흔적이며, 29필지의 국유지는 누군가 이 땅을 통제했다는 기록이다. 그 모든 층위를 읽어내는 첫걸음이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그 조사를 제대로 수행하는 문화재 발굴 기관을 선택하는 것이 이 땅의 다음 이야기를 결정한다.
땅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도시의 진짜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역사를 미래로 잇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세대가 서울이라는 도시에 남겨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할머니가 손녀의 손을 잡고 청파동 골목을 걷는다."이 길 아래에 네 증조할머니의 집터가 있단다."그 말이 사라지지 않으려면누군가는 먼저 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귀 기울임의 첫 번째 이름이다.땅의 기억을 미래로 잇는 일,지금 여기서 시작된다.
땅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귀 기울이는 사람이도시의 진짜 역사를 만난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 관한 더 많은 정보는 seoulheritage.org에서 확인하세요.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 의뢰는사업 계획의 초기 단계에 문화재 발굴 기관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입니다.
#문화재지표조사#문화재발굴기관#서울문화재발굴#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청파동#용산역사#서울문화유산#일제강점기토지#서울근현대사#동양척식주식회사#매장문화재#서울지표조사
출처 및 참고: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