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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용산구 청파동3가, 땅 위의 기록과 문화유산 발굴의 의미

목차


  1. 서두 – 땅이 기억하는 100년 전 청파동3가

  2. 1912년 청파동3가의 전체 규모와 도시적 맥락

  3. 집과 사람들의 이야기 – 109필지의 대지가 말해주는 삶

  4. 임야와 밭, 그리고 자연과 농업이 공존한 공간

  5. 잡종지의 쓰임새 – 변화를 예고한 과도기의 땅

  6. 국유지와 행정적 권력의 흔적

  7. 김씨, 이씨 그리고 토착 세력의 땅 소유 양상

  8.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침투와 식민지 경제 구조

  9. 법인 소유의 토지, 근대화의 징후

  10. 일본인의 30필지 – 강제 편입된 삶의 공간

  11. 오늘날 문화재 지표 조사와 1912년 기록의 연결고리

  12. 서울 지역 발굴조사의 성공 사례 – 과거를 만난 순간들

  13. 청파동에서 얻는 교훈 – 도시 개발과 역사 보존의 균형

  14. 결론 – 땅의 기억을 미래로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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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두 – 땅이 기억하는 100년 전 청파동3가


땅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100년 전 청파동3가의 기록은 잊혀진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있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3가. 지금은 대학과 주택가가 섞여 활기를 띠는 곳이지만, 1912년으로 돌아가면 풍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곳은 단순히 사람들이 살아가던 마을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대적 변화를 그대로 품은 공간이었다.


역사는 흔히 성곽이나 건물처럼 눈에 보이는 유산으로만 남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더 많은 흔적은 땅 속과 토지 기록에 숨어 있다. 그리고 이 땅의 이야기를 밝혀내는 과정이 바로 문화재 지표 조사, 발굴 조사다.





2.1912년 청파동3가의 전체 규모와 도시적 맥락



당시 청파동3가는 총 135필지, 면적은 168,063㎡였다. 이는 단순히 숫자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누가 땅을 가졌는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가, 그리고 누가 잃었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다.


서울은 이미 근대 도시로 변화하고 있었고, 용산은 철도와 군사 시설이 집중된 핵심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청파동3가는 농업과 주거, 행정과 군사적 목적이 한데 얽힌 독특한 구조를 띠었다.





3.집과 사람들의 이야기 – 109필지의 대지가 말해주는 삶



청파동3가에는 109필지, 52,866㎡의 대지가 있었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아이들이 뛰놀던 골목길, 저녁마다 피어오르던 연기,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살아가던 공동체의 풍경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문화재 발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이 바로 집터다. 기와 조각, 토기, 우물 흔적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만약 오늘날 청파동3가를 발굴한다면, 100년 전 사람들이 사용하던 생활 도구나 집터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4.임야와 밭, 그리고 자연과 농업이 공존한 공간



임야는 2필지, 9,269㎡였다. 이 작은 산과 숲은 마을의 울타리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밭은 20필지, 67,643㎡로 전체 면적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이는 청파동3가 주민들이 여전히 농업을 기반으로 살아갔음을 의미한다.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탄화된 곡물이나 농기구는 당시 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5.잡종지의 쓰임새 – 변화를 예고한 과도기의 땅



잡종지는 4필지, 38,284㎡였다. 잡종지는 군용지, 창고, 도로 예정지 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곧 도시 개발의 전초 단계였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서울에서 발굴된 잡종지에서는 군사용 도로 흔적이나 일본군 시설 터가 발견되곤 한다.





6.국유지와 행정적 권력의 흔적



청파동3가에는 29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이는 단순히 나라 땅이 아니라, 당시 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며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도구였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되는 돌축대, 관청 건물 터, 행정 시설 흔적은 모두 국유지의 기능과 연결된다.





7.김씨, 이씨 그리고 토착 세력의 땅 소유 양상



당시 이 지역의 토지는 김씨가 17필지, 이씨가 12필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가 여전히 힘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외부 세력이 점차 이곳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8.동양척식주식회사의 침투와 식민지 경제 구조



청파동3가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한 5필지가 있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척은 일본 제국이 조선의 토지를 빼앗기 위해 세운 대표적 기관이었다. 즉, 청파동3가는 이미 식민지 경제 구조 속에 편입되고 있었다.





9.법인 소유의 토지, 근대화의 징후



법인 소유의 토지는 1필지였는데, 당시에는 드물었다. 교회, 학교, 기업이 이런 땅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청파동이 단순히 전통적인 마을이 아니라, 근대적 변화가 스며들던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10.일본인의 30필지 – 강제 편입된 삶의 공간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일본인 소유 토지가 30필지나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토지 구조의 큰 변화를 의미한다. 일본인 거주지는 주거뿐 아니라 상업, 군사적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청파동은 이렇게 일본인과 한국인이 뒤섞인 공간으로 변화했다.





11.오늘날 문화재 지표 조사와 1912년 기록의 연결고리



문화재 발굴의 시작은 지표 조사다. 땅 위의 흔적을 관찰해 이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추정하는 작업이다. 1912년 기록은 일종의 역사적 ‘지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제 발굴이 이루어지면, 당시 주민들의 집터, 농업 흔적, 그리고 일본인 거주지 구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2.서울 지역 발굴조사의 성공 사례 – 과거를 만난 순간들



예를 들어 서울역 고가도로 철거 과정에서 발굴된 유적은 일제강점기 철도 관련 시설이었다. 또 종로 인근 개발지에서는 조선 후기의 우물과 생활 도구가 발견되었다. 이런 사례는 도시 개발과 발굴 조사가 만나 과거를 재현하는 순간이었다. 청파동 역시 만약 대규모 발굴이 진행된다면, 1912년 기록과 맞닿는 실물 증거들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13.청파동에서 얻는 교훈 – 도시 개발과 역사 보존의 균형



오늘날 서울은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개발만 앞세우면 소중한 역사적 흔적이 사라진다. 청파동3가의 사례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땅의 기억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문화재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는 그 해답 중 하나다. 개발 이전에 반드시 이 땅이 품은 과거를 살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길이다.





14.결론 – 땅의 기억을 미래로 잇다



1912년 용산구 청파동3가의 기록은 단순한 토지 대장이 아니다. 그 속에는 사람들의 삶, 일제의 지배, 근대화의 물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 우리가 문화재 발굴을 통해 이 땅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는, 과거를 복원해 현재와 미래를 잇기 위함이다.


땅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도시의 진짜 역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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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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