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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용산구 청파동1가, 땅이 말해주는 시간의 기록

  • 2025년 9월 22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리포트

'푸른 언덕'이라는 이름 아래,100년 전 청파동1가가 숨겨온 이야기

199필지·157,356㎡. 단순한 수치처럼 보이는 이 기록이 사실은 한 마을 사람들의 생존과 신앙,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상처까지 오롯이 담고 있다.

199

총 필지 수

157,356

총 면적(㎡)

165

대지 필지(집터)

19

일본인 소유 필지


목차 · Contents

  • 시작 1912년 청파동1가로 돌아가다

  • 01 집이 있던 땅, 삶의 터전 48,072㎡

  • 02 산과 임야 20,181㎡, 자연이 숨 쉬던 공간

  • 03 밭 89,101㎡, 먹거리를 지탱한 땅

  • 04 국유지 17필지, 국가의 몫으로 남겨진 땅

  • 05 김씨·이씨·민씨·박씨, 성씨별 땅 소유 구조

  • 06 미국인과 일본인의 존재, 외국인의 발자국

  • 07 일제강점기 토지 변화와 청파동의 운명

  • 08 1912년 땅과 현재 서울의 대비

  • 09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를 통해 본 과거의 복원

  • 10 성공 사례와 현장 이야기

  • 11 땅이 전하는 메시지, 우리가 배워야 할 것

  • 마무리 역사를 잇는 조사와 우리의 역할


지금 당신이 남영역에서 걸어 올라가는 그 청파동 골목길, 100년 전 그 자리는 벼와 보리가 자라던 밭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푸른 언덕'이라는 뜻의 청파(靑坡)라는 이름처럼, 1912년의 청파동1가는 오늘날의 빌라와 상가가 아닌 진짜 푸른 언덕과 논밭이 공존하는 마을이었다. 그 땅의 기록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청파동1가의 토지 기록에는 199필지, 총면적 157,356㎡의 데이터가 담겨 있다. 이 숫자 뒤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농부의 새벽 발걸음,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쓸쓸한 그림자까지 모두 들어 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보자.



시작하며 — 1912년 청파동1가로 돌아가다

우리가 매일 걷는 거리와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언제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 단순히 도시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공간이 사실은 100년 전 전혀 다른 풍경을 품고 있었다면,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상상력은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

서울 용산, 그중에서도 청파동1가는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로서 수많은 변화를 겪어온 곳이다. 1900년 전차가 개통되고, 1905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용산 일대는 급격히 변해갔다. 그러나 1912년 토지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 격변의 직전까지도 청파동1가에는 사람들이 땅을 일구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2년 청파동1가 토지 현황 — 핵심 통계

총 필지 수199필지

총 면적157,356㎡

대지 (집터)165필지 / 48,072㎡

임야3필지 / 20,181㎡

밭 (전)31필지 / 89,101㎡

국유지17필지

일본인 소유19필지

미국인 소유2필지

이 199필지의 땅 위에서 김씨, 이씨, 민씨, 박씨 가문이 살았고, 누군가는 밭을 갈았으며, 누군가는 임야에서 땔감을 구했다. 그리고 어느 골목에는 일본인 지주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기록 안에 담겨 있다. 이제 그 기록을 따라가 보자.


01 집이 있던 땅, 삶의 터전 48,072㎡

청파동1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수치는 대지다. 165필지, 48,072㎡. 전체 199필지 중 무려 83%가 사람이 살던 집터였다. 이것은 청파동1가가 순수한 농촌이 아니라, 이미 상당히 도시적인 주거 밀집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용산이라는 지역의 지리적 특수성, 즉 서울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요충지라는 특성이 주거 집중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집터들 위에는 저마다 다른 삶이 있었다. 기와집이 있었을 것이고, 서민들의 초가와 목조 주택도 있었을 것이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고, 대문 밖 골목길에서는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거나 팽이를 돌렸을 것이다. 저녁이면 아궁이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마을 전체가 밥 짓는 냄새로 가득 찼을 것이다.

"165필지라는 숫자는 단순히 집의 수가 아니다. 결혼식과 장례식, 아이의 첫 울음소리와 노인의 마지막 한숨이 모두 담긴 삶의 무대들이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발견되는 기와 조각이나 생활 도구들은 바로 이런 일상의 흔적이다. 아궁이 자리, 우물터, 기초석 하나도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귀중한 증거가 된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과거 사람들의 숨결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자료 이상의 감동을 준다.


02 산과 임야 20,181㎡, 자연이 숨 쉬던 공간



3필지, 20,181㎡의 임야. 지금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덮어버린 공간이지만, 1912년에는 나무와 풀, 바람이 살아 숨 쉬던 땅이었다. 청파(靑坡), 즉 '푸른 언덕'이라는 지명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연화봉이라는 야산이 있었고, 그 임야가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맞닿아 있었다.

이 임야는 겨울이 되면 장작과 숯을 제공하는 생존 창고였다. 봄에는 산나물을 뜯었고, 여름 무더위에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깐의 휴식을 얻었으며, 가을에는 도토리와 버섯을 채취해 겨울 식량을 비축했다. 마을 아이들에게는 숨바꼭질을 하던 놀이터였고, 어른들에게는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사색의 공간이기도 했다.

오늘날 지표조사를 통해 이런 임야의 흔적이 발견되면, 당시 사람들이 자연과 어떻게 공존했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개발과 환경 보존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오늘날의 질문과도 깊이 연결된다.


03 밭 89,101㎡, 먹거리를 지탱한 땅

31필지, 89,101㎡의 밭. 대지 면적인 48,072㎡보다 오히려 넓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다. 청파동1가 사람들이 집에서 살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는 여전히 땅을 직접 일궈서 해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벼, 보리, 콩, 고구마, 채소류. 밭에서 자라난 작물들이 청파동1가 사람들의 식탁을 채웠다. 일부는 자급자족에 쓰였고, 남는 것은 근처 시장에 내다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을 것이다. 도심과 가까운 지역에 이렇게 넓은 농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1912년 서울이 도시와 농촌이 아직 뒤섞여 있던 전환기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지금 이 땅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곡식을 저장하던 항아리의 파편이나 농기구의 흔적이 나올 수도 있다. 그것들이 바로 당시 청파동1가 사람들의 생존 방식과 경제 구조를 증언하는 산 증거가 된다.


04 국유지 17필지, 국가의 몫으로 남겨진 땅

1912년 청파동1가에는 17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전체 199필지의 약 8.5%다. 이 땅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군사적·행정적 목적이 가장 유력하다. 용산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주요 주둔지가 들어선 지역이었다. 일본군 기지와 맞닿은 청파동1가에 국유지가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이미 국가 권력의 강한 통제 아래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국유지는 개인이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매매할 수 없는 땅이다. 그 경계 안에서 사람들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국가 권력과 충돌하거나 타협해야 했다. 1912년 청파동1가의 국유지 17필지는 그 보이지 않는 압력의 지형도였다.


05 김씨·이씨·민씨·박씨, 성씨별 땅 소유 구조



1912년 청파동1가에서 누가 얼마나 땅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면 마을의 사회 질서가 보인다.

1912년 청파동1가 — 성씨별 토지 소유 필지 수

김씨

32필지

이씨

22필지

민씨

14필지

박씨

11필지

김씨 32필지, 이씨 22필지, 민씨 14필지, 박씨 11필지. 김씨가 가장 많은 땅을 가졌지만, 다른 성씨들도 분산되어 토지를 보유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청파동1가가 특정 씨족이 독점한 마을이 아니라, 여러 성씨가 공존하며 자신만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용산이라는 요충지의 특성상,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성씨와 관련된 토지 기록이 활용되면, 발굴된 유물의 소유 집단과 연결하여 당시 사람들의 삶을 훨씬 풍부하게 복원할 수 있다. 기와 한 장, 도기 파편 하나도 어느 집안의 것인지를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06 미국인과 일본인의 존재, 외국인의 발자국

1912년 청파동1가 기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외국인의 토지 소유다. 미국인이 2필지, 일본인이 무려 19필지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의 10%가 넘는다.

미국인 소유 2필지는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나 외교 관련 인물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1900년대 초 용산 일대에는 외국 선교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남긴 건축물과 토지 기록은 지금도 용산 일대 문화재 조사에서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반면 일본인 소유 19필지는 성격이 다르다. 이것은 조용한 침략의 흔적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들의 조선 토지 취득이 급격히 늘어났다. 용산이 일본군 기지와 맞닿아 있었기에, 청파동1가는 그 영향을 직격으로 받았다. 19필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조선인 가정 19곳이 땅을 잃거나 내주어야 했을 가능성을 뜻하는 숫자다.


07 일제강점기 토지 변화와 청파동의 운명



1912년은 청파동1가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의 기록이었다. 이후 청파동은 용산 일본군 기지와 맞닿아 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토지 구조가 빠르게 재편됐다. 일본인 소유지가 늘어나면서 기존의 조선인 토지 소유자들은 점점 밀려나갔다. 집을 잃은 사람도 생겼고, 마을의 물리적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청파동과 원효로 등지에 일본식 목조 가옥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낡은 가옥들은 100년이 넘은 지금도 당시의 이야기를 조용히 전하고 있다.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는 일본식 기와나 건축 자재들은 이 시기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증거들이다.

1912년 청파동1가의 19필지 일본인 소유지는 이후 더 빠르게 늘어났을 것이다. 조선인 농민과 주민들의 삶이 점점 자신의 땅에서 멀어지는 과정, 그것이 청파동이 겪어야 했던 식민지 시대의 운명이었다.


08 1912년 땅과 현재 서울의 대비

1912년 청파동1가

2026년 현재 청파동

논·밭·임야가 마을의 절반

빌라·상가·도로로 빈틈없이 채워짐

흙길, 골목, 우물가

아스팔트 도로, 지하 주차장

김씨·이씨·민씨 중심 공동체

이름도 모르는 이웃들

일본식 목조 가옥 유입 시작

일부 근대 건축물 문화재 등록

아파트 단지 전무, 소규모 주택

현재도 아파트 단지 없는 유일한 동

현재의 청파동1가는 빌딩과 도로, 다가구 주택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나무위키를 포함한 여러 자료에 따르면, 청파동은 지금도 서울에서 아파트 단지가 단 한 곳도 없는 드문 지역 중 하나다. 수십 년간 재개발이 논의됐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어쩌면 그 무산의 역사 속에, 이 땅이 조용히 지켜온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땅 속에는 여전히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그 흔적이 드러나면, 오늘날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이 단순한 현대 도시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09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를 통해 본 과거의 복원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이 시작되기 전, 그 땅이 지닌 역사적 흔적을 먼저 파악하는 과정이다. 전문가들이 1912년 토지 대장과 같은 역사 문헌을 검토하고, 현장을 직접 걸으며 지표면에 나타나는 유물의 흔적이나 지형의 특성을 살핀다. 청파동1가의 경우, 165필지의 대지 기록과 31필지의 밭, 17필지의 국유지 정보는 발굴 전 지층 구성을 예측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가 된다.

지표조사에서 문화재 존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시굴조사로 넘어간다. 실제로 땅 일부를 파서 유구와 유물의 존재를 확인하는 단계다. 중요한 발견이 있으면 정밀 발굴조사가 이어진다. 이 모든 과정을 담당하는 것이 문화재 발굴 기관이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을 비롯해 각 지역의 전문 조사 기관들이 이 역할을 맡고 있다.

발굴조사 의뢰 및 국비지원 안내

개인이나 사업자가 건축·토목 공사를 계획할 때,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면 사전에 발굴조사 의뢰를 검토해볼 수 있습니다. 소규모 발굴의 경우 국가유산청의 국비 지원 제도를 활용할 수 있으며, 대지 792㎡ 이하 단독주택이나 2,644㎡ 이하 농·어업 시설 등이 지원 대상입니다. 국가유산청 민원포털에서 신청 가능하며, 역사성이 높은 지역일수록 사전 지표조사를 거치는 것이 법적으로도 권장됩니다.


10 성공 사례와 현장 이야기

서울에서 진행된 여러 발굴조사 중에는 도심 한복판에서 뜻밖의 역사가 쏟아져 나온 사례가 많다. 종로구 일대 개발 현장에서는 조선시대 대규모 가옥 터와 생활 도구가 발견되어 도시 개발 계획이 수정된 일이 있었다. 또 광화문 광장 조성 과정에서는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의금부 관련 건물 터와 배수로 유구가 확인됐다. 사전 조사 덕분에 해당 유구를 기록하고 일부는 보존할 수 있었다.

청파동과 지리적으로 맞닿은 용산 일대에서도 근대기 건축 자재와 생활 유물이 발굴된 사례들이 있다. 일본식 기와와 조선식 기와가 같은 층에서 발견될 때, 그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두 문화가 충돌하고 섞이던 시대의 생생한 단면이 된다.

발굴은 불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나침반이 된다. 1912년 청파동1가의 기록이 그 나침반의 첫 번째 좌표가 될 수 있다.


11 땅이 전하는 메시지, 우리가 배워야 할 것

1912년의 청파동1가 땅은 수치로 남아 있지만, 그 속에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집터 165필지는 웃음과 눈물이 오간 삶의 무대였고, 밭 89,101㎡는 가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었으며, 임야 20,181㎡는 마을에 쉬어가는 숨을 주던 공간이었다. 국유지 17필지는 권력의 손길이 닿은 자리였고, 일본인 소유 19필지는 시대의 아픔이 새겨진 흔적이었다.

문화재 조사는 이런 메시지를 다시 듣는 과정이다.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더 깊은 역사를 가진 도시, 더 풍요로운 정체성을 가진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개발과 보존이 대립이 아닌 공존의 방식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날 문화재 발굴 기관과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날마다 하는 일이다.


마무리 — 역사를 잇는 조사와 우리의 역할



1912년 용산구 청파동1가의 기록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사례다. 199필지, 157,356㎡라는 숫자 뒤에는 수백 명의 삶이 있었고, 그 삶은 지금 이 순간에도 땅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가 현재의 개발 속에서도 과거의 흔적을 존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땅은 자원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 그릇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1912년 청파동1가의 밭에서 흙을 일구던 그 손들은 이제 없다. 하지만 그 손들이 남긴 이야기는 아직 땅 속에서 잠들어 있다.

발굴조사는 그 이야기를 세상에 불러내는 일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 간 사람들에게, 우리가 건넬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경의다.

오늘 청파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잠깐 멈춰 서서 발 아래 땅을 한번 바라봐 주길 바란다. 그 땅이 당신에게 이야기를 걸어올 것이다. 아주 오래된,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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