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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용산구 이촌동,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 2025년 9월 1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용산구 이촌동 역사

이촌동, 311필지가 품은 1912년의 기억철도·밭·사찰이 뒤섞인 땅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말하다

용산구 이촌동 · 311필지 · 1,049,006㎡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지금 이촌동 한강공원에서 바람을 맞고 있다면, 발 아래 땅은 100만㎡가 넘는 역사의 무게를 품고 있습니다.

고층 아파트와 한강 조망이 자랑인 이촌동. 그러나 1912년, 이 땅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311필지에 걸쳐 밭이 드넓게 펼쳐지고, 사찰이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보듬었으며, 철도가 막 놓이기 시작하던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씨·이씨·최씨 가문이 서로 이웃해 살아가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48필지의 일본인 소유지가 조용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매일 걷는 이촌동의 땅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 311필지, 100만㎡ — 이촌동 땅의 전체 풍경

  2. 집과 마을 — 260필지 대지가 말하는 삶의 터전

  3. 사사지와 임야 — 신앙과 자연이 공존하던 공간

  4. 잡종지와 철도용지 — 근대화의 첫 발자취

  5. 끝없이 펼쳐진 밭 — 829,702㎡ 농경 사회의 중심

  6. 성씨별 토지 소유 — 마을을 이끌던 사람들의 이름

  7. 국유지·마을 소유지·법인 소유지의 의미

  8. 48필지 일본인 소유지 — 식민지 시기의 그림자

  9.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이촌동의 과거

  10. 성공 사례와 마무리 — 땅에 새겨진 역사를 읽다



SECTION 01

311필지, 100만㎡ — 이촌동 땅의 전체 풍경

용산구 이촌동. 지금은 한강을 끼고 들어선 고급 아파트 단지와 한강공원으로 유명한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촌동은 총 311필지, 무려 1,049,006㎡에 달하는 광활한 땅이었습니다.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31만 평을 훌쩍 넘는 규모입니다.

100만㎡.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숫자입니다. 서울 월드컵경기장 부지 면적의 약 38배, 여의도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 광활한 땅 위에 빌딩도 도로도 없었습니다. 대신 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작은 사찰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고, 철도 한 줄기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던 공간이었습니다.

이 311필지의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 기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각 필지의 지목과 소유자 정보는 지표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예측하는 가장 정밀한 나침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은 언제나 이런 역사 기록에서 시작됩니다.

311총 필지 수

104.9만㎡총 면적

260대지 필지 수

43밭 필지 수

64김씨 소유 필지

48일본인 소유 필지


SECTION 02

집과 마을 — 260필지 대지가 말하는 삶의 터전

이촌동 311필지 중 260필지, 119,911㎡가 대지였습니다. 전체 필지 수의 84%가 사람이 집을 짓고 살아가는 터전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숫자는 이촌동이 이미 1912년에 상당히 밀집된 주거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60채의 집. 그 하나하나에 가족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놀고, 어른들은 밭에서 돌아와 저녁 밥상을 차리고, 할머니는 사랑방에서 손자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풍경. 한강이 코앞에 있던 이촌동의 집들에서는 강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인 삶이 매일 펼쳐졌을 것입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260필지의 대지는 가장 중요한 조사 대상 중 하나입니다. 주춧돌, 기초석, 우물터, 아궁이 잔재, 생활 도구 파편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한강변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나루터 관련 시설, 수리 구조물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구역의 문화재 지표조사는 조선 말기 이촌동 주민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핵심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260필지의 집터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는 작업. 그것이 문화재 발굴조사가 하는 일입니다.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이름도 기억도 사라진 이촌동 사람들의 삶에 다시 목소리를 돌려줄 수 있습니다.



SECTION 03

사사지와 임야 — 신앙과 자연이 공존하던 공간

이촌동 기록에서 흥미로운 두 필지가 눈에 띕니다. 단 1필지, 314㎡의 사사지와 1필지, 80,516㎡의 임야입니다. 숫자는 대지에 비해 작아 보이지만, 이 두 필지가 담고 있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사사지는 불교 사찰이나 신앙 공간을 뜻합니다. 314㎡, 지금으로 치면 약 100평 남짓한 이 작은 공간이 이촌동 마을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쉼터였습니다. 농사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절에 들러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던 사람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풍년이 들면 감사의 제를 올리던 공간. 그 작은 사사지 하나가 마을 공동체의 정신적 중심이었습니다.

임야 80,516㎡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촌동이 단순한 평야 마을이 아니라 산과 숲을 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겨울이면 나무꾼이 땔감을 구하러 오르던 산비탈, 여름이면 마을 아이들이 그늘에서 쉬던 숲. 이 임야는 마을의 생태적 균형을 유지하는 자연의 허파이기도 했습니다.

사사지는 문화재 발굴에서 특히 주목받는 지목입니다. 불상 파편, 제기류, 기와, 청동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고, 사찰의 건물지 유구가 잔존할 수 있습니다. 이촌동의 단 1필지 사사지는 작지만, 당시 이 지역 불교 신앙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발굴 지점이 될 수 있습니다.


SECTION 04

잡종지와 철도용지 — 근대화의 첫 발자취

이촌동의 1912년 기록에는 시대의 전환을 상징하는 두 가지 지목이 등장합니다. 잡종지 5필지, 10,479㎡와 철도용지 1필지, 8,082㎡. 특히 철도용지의 존재는 이 기록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1912년 이촌동에 철도가 놓이다

1910년대는 조선에서 철도가 빠르게 확산되던 시기였습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이촌동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철도 부설의 대상이 되었고, 8,082㎡에 달하는 철도용지가 이미 확보되어 있었습니다. 논밭 사이로 증기기관차가 지나가는 풍경. 처음 보는 철마(鐵馬)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이촌동 아이들의 눈빛이 상상됩니다. 이 철도용지는 이후 이촌동이 서울의 교통 핵심 지역으로 성장하는 첫 번째 발판이 되었습니다.

잡종지 5필지는 창고, 공동 작업장, 임시 경작지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을 공간입니다. 농경과 근대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던 이촌동에서 잡종지는 두 세계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지목이 확정되지 않은 이 땅들은 마을의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쓰임새를 바꾸며 존재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철도용지는 매우 흥미로운 조사 대상입니다. 1910년대 초기 철도 관련 구조물, 침목 흔적, 당시 사용된 건축 자재 등이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 근대화의 실물 증거로서 높은 역사적 가치를 지닙니다.

— ◆ —


SECTION 05

끝없이 펼쳐진 밭 — 829,702㎡ 농경 사회의 중심

이촌동의 1912년 기록에서 가장 압도적인 숫자는 바로 밭입니다. 43필지, 829,702㎡. 전체 면적 1,049,006㎡의 79%를 차지하는 규모입니다. 이촌동의 땅 대부분이 밭이었다는 것은 이 마을이 농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였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829,702㎡. 지금의 단위로 보면 약 25만 평에 달하는 밭. 한강 충적 평야에 자리 잡은 이촌동의 기름진 흙에서 쌀, 보리, 채소, 잡곡이 계절마다 자라났습니다. 봄이면 씨를 뿌리고, 여름이면 잡초를 뽑고, 가을이면 수확물을 거두어 마포나루나 동작진 시장으로 내다 팔았을 것입니다. 그 넓은 밭 위에서 이촌동 사람들의 땀과 노동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광활한 밭 구역은 농경 층위, 밭두렁 경계선, 수로 흔적, 씨앗 잔존물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한강 충적층에 형성된 농경지의 토양 단면에는 당시의 경작 방식과 작물 재배 패턴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정보는 조선 말기 한강변 농업 문화를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지금 이촌동 한강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잔디밭에 누워 있다면, 그 땅 아래 어딘가에 100년 전 농부가 고랑을 낸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땅은 그렇게 기억합니다.


SECTION 06

성씨별 토지 소유 — 마을을 이끌던 사람들의 이름

이촌동 311필지의 주인들은 누구였을까요. 1912년 기록에 등장하는 성씨들을 살펴보면 이 마을의 사회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김씨64필지최대 보유 가문

이씨33필지두 번째 규모

최씨21필지세 번째 규모

박씨17필지네 번째 규모

정씨10필지다섯 번째

김씨 64필지, 이씨 33필지. 두 가문이 이촌동 전체 필지의 약 31%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김씨 가문이 마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고, 이씨 가문이 그 옆에서 균형을 잡았을 것입니다. 마을 회의에서의 발언권, 공동 작업의 주도권, 혼사와 상사에서의 영향력이 이 두 가문을 중심으로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씨, 박씨, 정씨 외에도 다양한 성씨들이 나머지 필지를 나눠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촌동은 특정 씨족이 독점하는 마을이 아니라, 여러 혈연 공동체가 함께 어우러진 열린 마을이었습니다. 그 다양성이 이 마을을 더 풍요롭고 역동적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성씨 기록은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의 소유자를 추적하는 결정적 단서가 됩니다. 김씨 가문의 64필지, 이씨 가문의 33필지에서 출토된 비석 파편, 도자기, 생활 도구는 특정 가족의 삶을 증언하는 귀중한 유산이 됩니다. 1912년의 토지 기록과 발굴 유물이 만나는 순간, 이름 없던 파편이 역사로 거듭납니다.


SECTION 07

국유지·마을 소유지·법인 소유지의 의미

이촌동 311필지에는 개인 성씨 외에도 다양한 주체들의 소유지가 있었습니다. 국유지 3필지, 마을 공동 소유지 2필지, 법인 소유지 8필지. 이 필지들이 당시 이촌동의 사회적 구조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들입니다.

국유지 3필지는 관청 관련 시설, 도로, 하천 주변 부지로 쓰였을 것입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이촌동에서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 영역의 존재는 치수와 수운 관리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마을 공동 소유지 2필지는 두레와 품앗이가 이루어지던 공동 작업터, 마을 제당, 혹은 주민들이 함께 모이는 마당이었을 것입니다.

법인 소유지 8필지는 이촌동의 또 다른 면을 드러냅니다. 종교단체, 학교, 혹은 상업 기관이 이 마을에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근대화의 물결이 이촌동까지 닿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마을 공동 소유지와 국유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오랜 기간 다양한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고고학적 보고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동 공간에는 개인 소유지보다 더 다양한 층위의 유물이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SECTION 08

48필지 일본인 소유지 — 식민지 시기의 그림자

이촌동의 1912년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숫자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일본인 소유 토지 48필지. 전체 311필지의 약 15%에 달하는 땅이 이미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역사적 맥락 — 이촌동과 식민지 토지 수탈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일본인들의 조선 토지 취득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1912년은 토지조사사업이 막 시작된 시기로, 한강변 교통 요충지인 이촌동은 일본인들이 전략적으로 주목한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48필지라는 숫자는 합정동의 1필지, 토정동의 1필지, 하중동의 없음과 비교하면 이촌동에 식민지 권력이 얼마나 깊이 침투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조선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 이야기를 복원하는 것도 문화재 발굴조사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48필지 중에는 주거용 대지도 있었을 것이고, 수익을 위한 농경지도 있었을 것입니다. 철도용지와 인접한 이촌동의 지리적 특성을 생각하면, 일본인 소유지 중 일부는 철도 관련 사업과 연계된 토지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건물지 잔재, 일본식 건축 자재, 당시의 생활용품이 이 48필지 아래에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아픈 역사도 발굴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SECTION 09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이촌동의 과거

1912년 이촌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311필지의 지목과 소유자 정보는 지표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입니다.

이촌동은 서울에서도 개발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진 지역 중 하나입니다. 한강변 아파트 재건축이 이어지고 한강공원 정비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829,702㎡의 밭 아래에 잠든 농경 층위와 260필지 대지의 집터 유구, 그리고 사사지의 불교 관련 유물이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이촌동처럼 거대한 면적을 가진 지역에서 문화재 조사는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의 단계를 철저히 따르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100만㎡가 넘는 면적에서 한 구역의 조사 결과가 인접 구역의 문화재 존재를 예측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1912년의 기록은 이 모든 단계에서 첫 번째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철도용지 기록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1910년대 초기 철도 관련 구조물의 잔재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다면, 그것은 조선 근대화 과정의 실물 증거로서 매우 높은 역사적 가치를 지닙니다. 이촌동은 그만큼 다양한 층위의 역사가 쌓여 있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SECTION 10

성공 사례와 마무리 — 땅에 새겨진 역사를 읽다

성공 사례 01 — 인사동 금속활자, 기록이 실물로 돌아오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 금속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성과였습니다. 이촌동의 사사지와 대지 기록도 이와 유사한 발굴로 이어질 잠재력을 품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 한강변 마을 집터에서 조선 말기 생활상 복원

서울 한강변 인근 지역 시굴조사에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건물지 유구가 연속 확인되었습니다. 주춧돌, 아궁이 잔재, 생활용 도자기가 출토되어 당시 주거 구조와 생활 방식이 복원되었습니다. 이촌동의 260필지 대지 기록은 이와 거의 동일한 조건입니다.

성공 사례 03 — 근대화 시기 철도 관련 구조물 발굴

서울 특정 지역 개발 전 시굴조사에서 1910~20년대 철도 관련 침목 흔적과 당시 건축 자재가 출토되었습니다. 이촌동의 철도용지 기록은 이와 유사한 발굴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조선 근대화의 실물 증거가 이촌동의 땅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1912년 이촌동의 토지 구성은 단순한 수치가 아닙니다. 260필지 대지에서 시작된 삶, 829,702㎡ 밭에서 이어진 노동, 단 1필지 사사지에서 피어오른 향 연기, 그리고 철도용지와 48필지 일본인 소유지가 드러내는 시대의 변곡점. 이 모든 것이 이촌동이라는 땅의 진짜 얼굴입니다.

그 땅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땅의 뿌리를 이해하는 과정이고,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입니다. 이촌동의 311필지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311필지의 땅이 기억하는 것들우리는 그것을 되살려야 한다"

김씨 64필지의 넓은 밭, 이씨 33필지의 집터, 단 1필지 사사지에서 피어오르던 향 연기.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촌동의 아스팔트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철도가 처음 놓이던 흥분, 일본인 소유지 48필지가 드리우던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그 속에서도 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끈질긴 삶. 이촌동은 그 모든 이야기를 땅속에 새겨두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가 그 이야기를 세상으로 꺼내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의 첫 번째 단계는 언제나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이촌동의 311필지는 오늘도당신의 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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