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원효로4가, 땅과 사람들의 기록
- 서울 HI
- 8월 27일
- 3분 분량
목차
1. 서울 속 마을, 1912년 원효로4가의 풍경
2. 집과 대지의 규모 – 162필지 82,337㎡의 기록
3. 산과 임야 – 1필지 20,674㎡의 의미
4. 잡종지와 밭 – 생활과 생계의 흔적
5.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김씨, 이씨, 박씨, 임씨, 최씨의 이야기
6.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 – 일본과 미국의 그림자
7. 1912년 원효로4가의 사회적 맥락과 변화
8.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가치
9. 서울 유적 조사와 성공 사례
10. 결론 – 땅이 들려주는 과거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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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 원효로4가의 1912년 기록을 펼쳐보면 마치 오래된 지도를 여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우리가 흔히 오가던 용산구의 원효로4가는 지금은 빌딩과 아파트, 상가가 가득한 도시 공간이지만, 1912년 당시에는 전혀 다른 풍경을 품고 있었습니다. 땅의 쓰임새, 성씨별 소유 구조, 그리고 외국인의 진출까지, 작은 동네 안에 시대의 격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1912년 원효로4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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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속 마을, 1912년 원효로4가의 풍경
1912년 당시 원효로4가 전체 면적은 170필지, 약 106,764㎡였습니다. 이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단순한 숫자 같지만, 당시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주거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집과 밭, 임야, 잡종지, 그리고 외국인과 일본인이 소유한 땅까지 공존했던, 마치 작은 사회의 축소판 같은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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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과 대지의 규모 – 162필지 82,337㎡
원효로4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집과 대지였습니다. 총 162필지, 82,337㎡ 규모의 대지는 당시 거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이곳에 모여 살던 가족들이 골목과 마을을 이루며 생활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집이 많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지의 분포와 규모가 원효로4가 사람들의 사회적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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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과 임야 – 1필지 20,674㎡
흥미로운 점은 원효로4가에 1필지, 20,674㎡의 임야가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빽빽한 건물이 들어선 이곳이지만 당시에는 자연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임야는 단순히 산이 아니라, 나무를 베어 연료를 마련하거나 농사에 필요한 자원을 얻던 중요한 생활 기반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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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잡종지와 밭 – 생활과 생계의 흔적
원효로4가에는 잡종지가 2필지 581㎡, 밭이 5필지 3,170㎡ 있었습니다.
잡종지는 집이나 밭으로 분류되지 않는 땅으로, 당시에는 공동 공간이나 특정한 목적(예: 길, 창고, 임시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밭은 주민들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식량을 자급했던 흔적을 보여줍니다.
즉, 원효로4가는 도시이면서도 농촌적 삶의 요소가 공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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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김씨, 이씨, 박씨, 임씨, 최씨
1912년 원효로4가에서는 특정 성씨들이 다수의 토지를 보유하며 마을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 김씨: 29필지
• 이씨: 14필지
• 박씨: 12필지
• 임씨: 10필지
• 최씨: 10필지
이 기록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당시 원효로4가의 사회적 중심을 형성한 씨족과 가문이 누구였는지를 말해줍니다. 이는 곧 서울 속 작은 공동체의 구조를 이해하는 단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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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 – 일본과 미국의 그림자
1912년은 한일병합 직후,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원효로4가에도 그 흔적이 선명합니다.
• 국유지: 4필지
• 미국인 소유지: 1필지
• 일본인 소유지: 무려 39필지
특히 일본인의 소유지가 39필지에 달했다는 사실은 당시 토지 강탈과 외국인 소유 확대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단순한 한 동네의 기록이 아니라, 시대적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역사적 증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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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12년 원효로4가의 사회적 맥락과 변화
원효로4가의 토지 구조를 보면, 단순히 땅이 어떻게 쓰였는지만이 아니라 사회의 불평등 구조까지 드러납니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 위에 일본인과 외국인의 소유지가 늘어났다는 것은, 결국 서울 도심 속에서부터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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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가치
이러한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통계 자료가 아니라,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토대가 됩니다.
서울에서 재개발이나 공공사업을 진행할 때 반드시 지표조사를 거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땅속에 묻힌 과거의 흔적을 무시하고 개발을 진행하면, 소중한 문화유산을 영영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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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울 유적 조사와 성공 사례
예를 들어, 서울의 한 아파트 개발 부지에서 진행된 지표조사 중 고대 토기와 생활 흔적이 발견되어 공사가 잠시 중단된 사례가 있습니다. 이는 개발이 단순히 현대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원효로4가의 1912년 기록도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향후 발굴조사에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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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결론 – 땅이 들려주는 과거와 현재
1912년 원효로4가는 단순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대지와 밭, 임야와 잡종지,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가 뒤섞여 있었고, 김씨와 이씨, 박씨, 임씨, 최씨 가문이 모여 살던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에 일본과 미국의 영향력까지 드리워져 있었던 그 모습은, 지금의 서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작은 동네의 기록 속에서 한국사의 진짜 이야기를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서울의 땅은 여전히 과거의 목소리를 품고 있으며, 그것을 제대로 들어줄 때 비로소 현재와 미래가 더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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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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