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원효로4가, 땅과 사람들의 기록
- 2025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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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용산구 원효로4가 역사
원효로4가, 170필지가 품은 1912년의 비밀일본·미국·조선이 뒤섞인 땅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말하다
용산구 원효로4가 · 170필지 · 106,764㎡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오래된 지도를 펼치는 순간, 지금의 용산 빌딩 숲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납니다.
1912년 원효로4가. 김씨·이씨·박씨·임씨·최씨 가문이 골목을 나누어 살고, 밭에서 채소를 기르고, 임야에서 땔감을 구하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의 170필지 안에는 놀라운 것이 숨어 있었습니다. 일본인 소유지 39필지, 그리고 미국인 소유지 1필지. 조선·일본·미국의 땅이 한 동네 안에서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오가던 원효로4가의 거리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912년 원효로4가, 170필지의 전체 풍경
집과 대지 — 162필지가 말하는 삶의 터전
산과 임야 — 1필지 20,674㎡의 자연이 남긴 흔적
잡종지와 밭 —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던 공간
성씨별 토지 소유 — 다섯 가문이 이룬 마을의 중심
국유지·일본인·미국인 소유지 — 세 나라의 그림자
1912년 원효로4가의 사회적 맥락 — 불평등한 땅의 구조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과거의 기록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기억들
마무리 — 땅이 들려주는 과거와 현재

SECTION 01
1912년 원효로4가, 170필지의 전체 풍경
용산구 원효로4가. 지금은 빌딩과 아파트, 상가가 가득한 도시 공간이지만, 1912년에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원효로4가는 총 170필지, 106,764㎡의 땅이었습니다.
170필지. 단순한 숫자 같지만, 이 안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과 시대의 격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집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산이 있었으며, 그 위에 조선인과 일본인과 미국인의 이름이 뒤섞여 새겨져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 안에 시대의 모순이 응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발굴 기관들에게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목의 용도와 소유자 정보는 지표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예측하는 가장 정밀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원효로4가의 1912년 기록은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번째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170총 필지 수
106,764㎡총 면적
162대지 필지 수
39일본인 소유 필지
29김씨 소유 필지
1미국인 소유 필지
SECTION 02
집과 대지 — 162필지가 말하는 삶의 터전
원효로4가 170필지 중 162필지, 82,337㎡가 대지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95%가 넘는 압도적인 비중입니다. 이 숫자는 원효로4가가 이미 1912년에 전형적인 주거 밀집 지역으로 성장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62채의 집.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마을들과 비교해도 이례적으로 높은 대지 비율입니다. 원효로4가는 논밭 중심의 농촌 마을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살며 골목 공동체를 이루던 주거지였습니다. 한양 도성과 가깝고 용산 일대의 교통 요충지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이 이 높은 주거 밀도를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상상해보세요 — 1912년 원효로4가의 어느 골목좁은 골목 양쪽으로 기와집과 초가집이 빼곡히 이어집니다. 아침이면 어느 집에서나 밥 짓는 냄새가 흘러나오고,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닙니다. 김씨 댁 옆에는 이씨 댁이, 그 건너편에는 박씨 댁이 있었습니다. 162개의 집터에서 162개의 다른 삶이 동시에 펼쳐지던 곳. 지금 그 자리에 빌딩이 서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162필지의 대지는 매우 중요한 조사 구역입니다. 주춧돌, 기초석, 우물터, 아궁이 잔재, 생활 도구 파편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한양 도성과 가까운 지역의 특성상,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생활 층위가 발굴될 수 있습니다.

SECTION 03
산과 임야 — 1필지 20,674㎡의 자연이 남긴 흔적
162필지의 밀집 주거지 안에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단 1필지, 20,674㎡의 임야입니다. 지금은 빽빽한 건물들이 들어선 이곳에 1912년에는 나무가 우거진 산자락이 남아 있었습니다.
20,674㎡, 약 6,250평의 임야. 이 숫자가 놀라운 이유는 주거 밀집 지역 안에 이만한 크기의 자연이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임야는 마을 사람들에게 여러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겨울을 대비한 땔감을 구하러 올라가는 산이기도 했고,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으며, 마을의 생태적 기반이 되는 녹지이기도 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임야 구역은 흥미로운 조사 대상입니다. 오랜 기간 인간의 손이 덜 닿은 이 구역에는 더 온전한 형태의 고고학적 층위가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임야와 대지가 맞닿는 경계 구역에서는 당시 마을이 어떻게 자연과 관계 맺었는지를 보여주는 유구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숯 가마 터나 목재 저장 구조물의 흔적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SECTION 04
잡종지와 밭 —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던 공간
원효로4가의 나머지 필지들도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잡종지 2필지, 581㎡와 밭 5필지, 3,170㎡가 있었습니다. 대지 162필지의 압도적인 비중에 비하면 작은 숫자이지만, 이 땅들이 당시 원효로4가의 생활상을 완성하는 중요한 조각입니다.
5필지의 밭, 3,170㎡. 약 960평 규모의 이 경작지에서 원효로4가 주민들은 직접 채소를 길렀습니다. 도시적 성격이 강한 이 마을에서도 농촌의 자급자족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집 앞 작은 텃밭에서 고추와 상추를 기르고, 가을이면 이웃과 나누는 풍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잡종지 2필지는 용도가 유동적인 땅이었습니다. 마을 골목의 넓은 부분, 공동 물 긷는 공간, 임시 작업터 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주거 밀집 지역에서 이런 공용 공간의 존재는 마을 공동체 생활의 윤활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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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05
성씨별 토지 소유 — 다섯 가문이 이룬 마을의 중심
1912년 원효로4가의 토지 기록에서 다섯 성씨가 눈에 띄게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마을의 사회적 중심을 이룬 가문들이었습니다.
김씨29필지최대 보유 가문
이씨14필지두 번째
박씨12필지세 번째
임씨10필지네 번째
최씨10필지다섯 번째
김씨 29필지가 가장 많고, 이씨 14필지, 박씨 12필지, 임씨와 최씨가 각각 10필지로 뒤를 이었습니다. 다섯 성씨를 합치면 75필지로, 전체 170필지의 44%에 달합니다. 이 다섯 가문이 원효로4가의 사회적 중심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마을들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납니다. 이촌동의 김씨 64필지, 창전동의 김씨 98필지에 비해 원효로4가의 김씨 29필지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이는 원효로4가가 특정 가문이 독점하는 단일 씨족 마을이 아니라, 다양한 가문이 비교적 균등하게 공존하는 복합 공동체였음을 시사합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 성씨 기록은 출토된 유물의 소유자를 추적하는 결정적 단서가 됩니다. 원효로4가에서 비석 파편, 도자기, 생활 도구가 발굴될 때, 이 다섯 가문의 기록이 유물을 특정 가족의 이야기와 연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SECTION 06
국유지·일본인·미국인 소유지 — 세 나라의 그림자
원효로4가의 1912년 기록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이 여기 있습니다. 이 마을 170필지 안에는 조선인의 땅 외에도 국유지 4필지, 일본인 소유지 39필지, 그리고 미국인 소유지 1필지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국유지4필지
일본인 소유39필지
미국인 소유1필지
일본인 소유 39필지. 전체 170필지의 약 23%입니다. 다섯 성씨 전체(75필지)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2년, 일본인들이 원효로4가에 이미 이토록 깊숙이 진출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이촌동 48필지, 이태원동 36필지와 비교할 때 원효로4가의 39필지는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전략적 관심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역사적 맥락 — 원효로4가의 미국인 소유지
원효로4가의 기록에서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처음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인 소유지 1필지입니다. 1912년 조선에는 기독교 선교사와 외교관, 상인 등 다양한 이유로 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용산 일대는 외국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지역이었고, 원효로4가의 미국인 소유지 1필지는 그 역사적 흔적입니다. 동시에 조선·일본·미국의 이해관계가 이 좁은 마을 안에서 교차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원효로4가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국제적 힘의 자장 안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세 나라의 땅이 공존했던 원효로4가의 골목. 조선인 가족과 일본인 이웃, 그리고 어딘가에 미국인의 집이 있었던 그 좁은 공간의 긴장감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 긴장감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도 문화재 발굴조사의 역할입니다.

SECTION 07
1912년 원효로4가의 사회적 맥락 — 불평등한 땅의 구조
원효로4가의 토지 구조를 보면 단순히 땅이 어떻게 쓰였는지만이 아니라,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김씨·이씨·박씨·임씨·최씨 다섯 가문이 75필지를 나눠 가진 반면, 일본인 한 집단이 39필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 전체 다섯 가문의 땅과 일본인 소유지의 차이가 36필지에 불과합니다.
이 수치는 1912년 당시 원효로4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얼마나 불균등한 조건 위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조선인들은 대를 이어 가꿔온 땅에서 생활했지만, 식민지 체제 아래서 그 땅이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불안 속에 있었습니다. 그 불안의 흔적이 이 39필지라는 숫자 안에 담겨 있습니다.
국유지 4필지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12년의 국유지는 일본 통감부 체제 아래서 공공시설이나 행정기관의 기반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이 4필지는 식민지 행정 권력이 원효로4가 안에 공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SECTION 08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과거의 기록
1912년 원효로4가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원효로4가는 다른 마을들에 비해 더욱 복잡한 역사 층위를 갖고 있습니다. 조선인의 생활 유구, 일본인 건물지의 잔재, 미국인 관련 시설의 흔적이 같은 공간 안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재개발이나 공공사업을 진행할 때 반드시 지표조사를 거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효로4가처럼 한 동네 안에 여러 시대, 여러 국적의 흔적이 뒤섞인 경우 굴착 공사 한 번에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원효로4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특히 주목해야 할 구역이 있습니다. 일본인 소유지 39필지의 위치와 배치, 미국인 소유지 1필지의 구조물 잔재, 그리고 국유지 4필지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구역들에서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의 다층적 역사가 한꺼번에 드러날 수 있습니다.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의 단계적 접근이 필수적입니다.

SECTION 09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기억들
원효로4가의 가능성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성공 사례 01 — 아파트 개발 부지에서 발견된 고대 토기
서울 한 아파트 개발 부지에서 진행된 지표조사 중 고대 토기와 생활 흔적이 발견되어 공사가 잠시 중단된 사례가 있습니다. 이는 개발이 단순히 현대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원효로4가의 162필지 대지 기록은 이와 유사한 발굴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 인사동 금속활자, 기록이 실물로 돌아오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 발굴에서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성과였습니다. 원효로4가처럼 한양 도성과 가까운 주거 밀집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발굴이 이루어질 잠재력이 있습니다.
성공 사례 03 — 용산 일대 다층 역사 유구 발굴
용산구 일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들에서 조선시대 생활 유구와 일제강점기 건물지가 같은 지점에서 중첩되어 출토된 사례가 있습니다. 두 시대의 흔적이 하나의 발굴 현장에서 동시에 드러난 이 사례는, 원효로4가처럼 조선인·일본인·미국인의 땅이 공존했던 지역에서 반드시 기대할 수 있는 발굴 성과입니다.

SECTION 10
마무리 — 땅이 들려주는 과거와 현재
1912년 원효로4가는 단순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162필지의 집터에서 피어오르던 밥 짓는 연기, 5필지의 밭에서 자라던 채소, 20,674㎡의 임야에서 울려 퍼지던 새소리. 그 위에 김씨·이씨·박씨·임씨·최씨 다섯 가문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는 일본인 39필지의 그림자와 미국인 1필지의 흔적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조선·일본·미국이라는 세 나라의 이름이 170필지 안에서 뒤섞인 이 마을은, 당시 서울이 얼마나 복잡한 국제적 맥락 속에 놓여 있었는지를 작은 골목 하나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서울의 땅은 여전히 과거의 목소리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들어줄 때 비로소 현재와 미래가 더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효로4가의 170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이제 당신도 함께 기억해 주세요.

"170필지 안에 세 나라가 있었다그 땅이 지금 당신에게 말을 건다"
김씨 29필지의 집터, 이씨 14필지의 골목, 박씨·임씨·최씨 가문의 삶이 펼쳐지던 그 마을 안에, 일본인의 39필지와 미국인의 1필지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20,674㎡의 임야에서 내려오는 바람, 5필지의 밭에서 자라는 채소, 그리고 시대의 격랑 속에서도 골목을 지키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거리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이야기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는 작업입니다. 당신의 관심이 그 첫 번째 삽이 됩니다.
원효로4가의 170필지는 오늘도당신의 발 아래에서 세 나라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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