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원효로3가, 땅과 사람의 기록 – 문화유산 발굴로 읽는 옛 마을의 풍경
- 서울 HI
- 8월 22일
- 4분 분량
목차
1. 사라진 마을을 찾아서 – 1912년 원효로3가의 시작
2. 270필지의 집터, 그리고 사람들의 삶
3. 길 위의 역사 – 도로부지와 마을의 연결망
4. 사사지와 임야, 그리고 조상들의 흔적
5. 잡종지와 밭, 생활의 터전
6. 땅 위의 성씨들 – 김씨에서 일본인까지
7. 국유지와 공동소유지, 그리고 법인의 등장
8.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시대의 그림자
9. 문화유산 발굴과 지표조사로 되살아나는 기록
10. 오늘의 용산, 과거에서 배우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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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라진 마을을 찾아서 – 1912년 원효로3가의 시작
1912년이라는 숫자는 지금의 우리에게 꽤 먼 과거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불과 100여 년 전의 이야기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3가는 지금은 교통의 요지이자 수많은 건물이 들어선 도시의 중심지이지만, 당시만 해도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체 면적은 136,565㎡, 294필지에 달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계산하면 꽤 큰 마을이었고, 그 안에는 사람들의 집과 밭, 묘역, 임야, 잡종지가 어우러져 있었다.
문화유산 발굴조사라는 것이 없다면 이런 기록은 단순한 숫자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땅 속에서 발견되는 흔적들과 함께 보면, 그것은 생생한 마을의 풍경으로 살아난다. 골목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밭을 일구며 땀을 흘리던 농부의 모습, 장날이면 북적거리던 장터의 활기. 원효로3가의 1912년은 바로 그런 삶의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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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70필지의 집터, 그리고 사람들의 삶
당시 원효로3가에는 무려 270필지, 총 103,610㎡의 집터가 있었다. 이 말은 곧 작은 마을이 아니라, 이미 도시적 성격을 띠는 거주지였다는 뜻이다. 흙담으로 둘러싸인 초가집, 양반 가문의 기와집, 그리고 일부는 일본식 가옥도 자리했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기와 조각, 백자 조각, 생활 도구들은 그 집터의 주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근처에서 발견된 자기류 파편은 당시 주민들이 단순히 의식주만 해결하는 삶이 아니라 나름의 미적 감각과 생활문화를 향유했음을 알려준다.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가족의 일상과 사회적 관계를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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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길 위의 역사 – 도로부지와 마을의 연결망
원효로3가에는 도로부지가 2필지, 1,983㎡ 기록되어 있다. 작은 수치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도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혈관 같은 존재였다. 길을 통해 사람들은 교류했고, 물자는 이동했으며, 정보가 퍼져나갔다.
발굴조사에서는 종종 마차 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길바닥 흔적이나, 배수로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길이 아니라, 당시 사회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지금 우리가 원효로를 걸을 때 느끼는 도심의 소음 속에도 사실은 100년 전 사람들이 오갔던 발자국이 겹쳐져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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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사지와 임야, 그리고 조상들의 흔적
1912년 원효로3가에는 사사지가 1필지, 158㎡ 있었다. 사사지는 사적인 묘지로, 가족이나 가문의 조상을 모신 공간이었다. 지금은 빌딩 숲으로 변했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마을 어귀에는 작은 묘지가 있었던 셈이다.
또한 1필지, 2,694㎡의 임야도 존재했다. 이곳은 단순한 숲이 아니라 생활 자원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나무를 베어 땔감을 만들고, 약초를 캐거나 산나물을 채취했다. 발굴 현장에서 숯이나 목재 흔적이 발견될 때, 우리는 이 임야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생활과 밀접히 연결된 자원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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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잡종지와 밭, 생활의 터전
잡종지는 4필지, 6,502㎡에 달했다. 잡종지는 규정되지 않은 다양한 용도로 쓰이던 땅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하거나 장터로 활용했을 수도 있다. 이런 공간은 공동체적 생활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6필지, 21,616㎡의 밭이다. 농업은 당시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이었다. 밭에서는 보리, 조, 콩, 채소류가 재배되었을 것이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되는 곡물 저장용 토기나 농기구 파편은, 바로 이런 생활의 근거를 증언한다. 밭은 곧 생명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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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땅 위의 성씨들 – 김씨에서 일본인까지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김씨가 52필지, 박씨가 31필지, 이씨가 20필지, 최씨가 19필지, 전씨가 10필지를 소유했다. 이는 특정 성씨 중심의 마을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성씨가 많이 모여 살면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했고, 이는 제사와 혼인, 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인 소유가 54필지였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들은 서울 곳곳에 토지를 매입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원효로3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단순한 땅의 이동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를 뒤흔드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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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국유지와 공동소유지, 그리고 법인의 등장
국유지는 3필지, 공동소유지는 3필지 기록되어 있다. 국유지는 국가가 관리하는 땅으로, 도로 확장이나 행정적 목적에 쓰였을 것이다. 공동소유지는 마을 주민들이 함께 관리하며 사용한 땅이었다. 제사를 지내거나 공동작업을 하는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인이 소유한 20필지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이었다. 근대적 토지 관리 개념이 점차 마을에 스며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땅들은 학교, 교회, 혹은 일본 기업의 소유였을 수도 있다. 이는 원효로3가가 단순히 전통적 농촌 마을이 아니라, 근대적 변화를 겪던 공간이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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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시대의 그림자
1912년 당시 일본인 소유가 54필지에 달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땅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소유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원효로3가에서 확인된 일본인 소유 기록은 그 정책의 구체적 결과였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땅을 잃은 조선인들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임금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나는 토지 기록은 바로 그 시대의 사회적 아픔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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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화유산 발굴과 지표조사로 되살아나는 기록
이 모든 기록은 단순한 문서에서 끝나지 않는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진행될 때마다 땅 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흔적들이 역사를 입체적으로 복원한다. 집터의 기초, 도로 흔적, 토기 파편, 묘역의 구조. 이런 것들은 100년 전 원효로3가의 삶을 다시 눈앞에 펼쳐놓는다.
특히 서울시에서 진행한 여러 지표조사에서는 “사라진 마을”이 다시 드러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 후손들에게 뿌리를 알려주고, 현재의 도시 개발 속에서도 문화유산을 지켜야 할 이유를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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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늘의 용산, 과거에서 배우는 미래
지금의 원효로3가는 아파트 단지, 상업지구, 교통의 중심지로 변했다. 하지만 그 땅 속에는 여전히 1912년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발굴조사와 지표조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길 밑, 우리가 사는 집터 밑에는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가 잠들어 있다. 원효로3가의 발굴 기록은 우리에게 단순히 과거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준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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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1912년 원효로3가의 294필지는 단순한 토지 기록이 아니라, 사람과 땅이 함께 살아온 역사 그 자체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그 이야기를 오늘날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다. 우리가 이 기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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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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