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원효로3가, 땅과 사람의 기록 – 문화유산 발굴로 읽는 옛 마을의 풍경
- 2025년 8월 22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용산구 원효로3가 역사
원효로3가, 294필지가 품은 1912년의 도시 마을집터·도로·일본인 54필지가 말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용산구 원효로3가 · 294필지 · 136,565㎡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1912년 원효로3가는 사라진 마을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 아래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교통의 요지, 빌딩 숲, 아파트 단지로 가득한 지금의 원효로3가. 하지만 113년 전, 이 땅에는 골목에서 뛰어놀던 아이들과 밭을 일구는 농부, 장날 북적이는 장터가 있었습니다. 294필지, 136,565㎡의 기록 속에는 김씨·박씨·이씨 가문의 삶과 함께, 54필지에 달하는 일본인 소유지의 그림자도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매일 오가는 원효로의 거리가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912년 원효로3가 — 294필지의 전체 풍경
270필지의 집터 — 도시적 성격을 띠던 주거 공간
도로부지 — 마을 공동체의 혈관이었던 2필지
사사지와 임야 — 조상과 자연이 공존하던 공간
잡종지와 밭 — 생활의 터전이 된 20필지
성씨별 토지 소유 — 김씨 52필지가 이끈 마을 구조
국유지·공동소유지·법인 소유지 — 근대화의 흔적
일본인 54필지 — 이 시리즈 최대 규모의 식민지 그림자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로 되살아나는 기록
마무리 — 오늘의 용산, 과거에서 배우는 미래

SECTION 01
1912년 원효로3가 — 294필지의 전체 풍경
용산구 원효로3가. 지금은 서울의 교통 요지이자 상업·주거 복합 지역으로 자리 잡은 이 거리가,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원효로3가는 총 294필지, 136,565㎡의 땅이었습니다.
294필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마을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많은 필지 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집터, 즉 대지의 비중입니다. 전체 294필지 중 270필지가 대지였습니다. 전체의 92%가 집터였다는 것은, 원효로3가가 농경 마을이 아니라 이미 강한 도시적 성격을 띤 주거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기록 안에서 가장 무거운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일본인 소유지 54필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모든 마을 중 단연 최대 규모의 일본인 토지 소유입니다. 합정동 1필지, 구로동 13필지, 이촌동 48필지를 넘어서는 이 숫자는, 1912년 원효로3가가 식민지 수탈의 최전선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94총 필지 수
136,565㎡총 면적
270대지 필지 수
54일본인 소유 필지
52김씨 소유 필지
20법인 소유 필지
SECTION 02
270필지의 집터 — 도시적 성격을 띠던 주거 공간
원효로3가 294필지 중 270필지, 103,610㎡가 대지였습니다. 전체의 92%. 이 압도적인 비율은 원효로3가가 이미 1912년에 도시 주거지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논밭이 펼쳐진 농촌 마을이 아니라,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 살던 도시 구역이었습니다.
270채의 집. 흙담으로 둘러싸인 초가집과 기와를 얹은 중산층 가옥, 그리고 일부는 일본식 가옥도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이웃들이 얼굴을 맞대며 살았고,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놀고, 장이 서는 날이면 온 동네가 활기를 띠었을 겁니다. 오늘날 원효로를 걸을 때 느끼는 도심의 소음 속에도, 100년 전 사람들이 오갔던 발자국이 겹쳐져 있는 것입니다.
270필지의 대지는 문화재 발굴에서 가장 집중적인 조사 가치를 갖는 구역입니다. 기와 조각, 백자 파편, 생활 도구들이 이 집터들 아래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근처에서 발견된 자기류 파편은 당시 주민들이 단순한 의식주만이 아니라 나름의 미적 감각과 생활 문화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집터 하나하나가 당시 사람들의 삶을 담은 타임캡슐입니다.
원효로4가(162필지 대지, 95%)와 비교할 때 원효로3가의 270필지(92%)는 비슷한 수준입니다. 원효로 일대 전체가 이미 1912년에 높은 주거 밀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원효로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두 마을이 당시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도 흥미로운 역사 연구 주제입니다.

SECTION 03
도로부지 — 마을 공동체의 혈관이었던 2필지
원효로3가의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가 도로부지 2필지, 1,983㎡입니다. 면적은 크지 않지만, 이 2필지가 가지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1912년 원효로3가의 길이 담은 것당시의 도로는 단순한 통행로가 아니었습니다. 길을 통해 이웃들이 교류하고, 물자가 이동하고, 소식이 퍼져나갔습니다. 장날이면 물건을 이고 지고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명절이면 동네 어른들이 모여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나눴습니다. 도로부지 2필지는 원효로3가 마을 공동체를 연결하는 혈관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는 종종 마차 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길바닥 흔적이나 배수로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이런 도로 유구는 당시 마을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지표조사에서 이 2필지의 도로부지 위치를 파악하면, 당시 원효로3가의 마을 구조 전체를 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시리즈에서 도로부지가 기록된 마을은 원효로3가가 처음입니다. 이것은 원효로3가가 다른 마을들에 비해 이미 근대적인 도시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SECTION 04
사사지와 임야 — 조상과 자연이 공존하던 공간
원효로3가의 270필지 대지와 도로부지 옆에, 삶과 죽음과 자연이 공존하던 두 공간이 있었습니다. 사사지 1필지, 158㎡와 임야 1필지, 2,694㎡입니다.
사사지 158㎡는 가족이나 가문의 조상을 모신 작은 묘지였습니다. 지금은 빌딩 숲이 된 이곳에, 불과 113년 전만 해도 마을 어귀 어딘가에 조상을 기리는 작은 묘역이 있었습니다. 기일이면 제사를 지내고, 명절이면 성묘를 가던 그 공간. 규모는 작지만 담고 있는 기억은 무겁습니다.
임야 2,694㎡도 흥미롭습니다. 270필지의 집터가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적 마을 안에 산과 숲의 공간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원효로3가가 완전히 도시화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주민들이 나무를 베어 땔감을 마련하고, 약초를 캐고, 산나물을 채취하던 이 임야는 도시 속 자연의 마지막 흔적이었습니다.
사사지와 임야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습니다. 사사지에서는 묘비 파편, 제기류, 매장 관련 유물이 출토될 수 있습니다. 임야에서는 숯 가마 터나 목재 저장 구조물의 흔적이 발굴되기도 합니다. 원효로3가의 이 두 필지는 발굴 가능성이 높은 핵심 조사 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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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05
잡종지와 밭 — 생활의 터전이 된 20필지
원효로3가의 나머지 필지들, 잡종지 4필지, 6,502㎡와 밭 16필지, 21,616㎡도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270필지의 대지에 비하면 적은 수이지만, 이 20필지가 당시 원효로3가의 생활 경제를 완성하는 조각이었습니다.
밭 16필지, 21,616㎡. 270필지의 집터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이 밭들에서는 보리, 조, 콩, 채소류가 재배되었을 것입니다. 도시적 성격이 강했던 원효로3가에서도 직접 채소를 기르는 농촌의 생활 방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집 앞 작은 텃밭에서 상추와 고추를 기르고 이웃과 나누는 풍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잡종지 4필지는 공동체 생활의 윤활유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하거나 장터로 활용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을 이 공간은 규정할 수 없는 자유로운 땅이었습니다. 이런 공간의 존재가 원효로3가를 단순한 주거지가 아닌 살아있는 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SECTION 06
성씨별 토지 소유 — 김씨 52필지가 이끈 마을 구조
1912년 원효로3가의 토지 기록에서 다섯 성씨가 두드러지게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김씨52필지최대 보유 가문
박씨31필지두 번째
이씨20필지세 번째
최씨19필지네 번째
전씨10필지다섯 번째
일본인54필지식민지 소유
김씨 52필지, 박씨 31필지, 이씨 20필지, 최씨 19필지, 전씨 10필지. 다섯 성씨를 합치면 132필지로, 전체 294필지의 45%에 달합니다. 김씨 가문이 마을의 중심을 잡고 있었고, 박씨와 이씨, 최씨, 전씨가 그 옆에서 마을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선인 최대 보유 가문인 김씨(52필지)보다 일본인(54필지)이 더 많은 필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을의 주인인 조선인 가문 중 1위보다 외지에서 온 일본인의 소유지가 더 많다는 것. 1912년 원효로3가의 현실이 이 숫자 하나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SECTION 07
국유지·공동소유지·법인 소유지 — 근대화의 흔적
원효로3가 기록에는 개인 소유지 외에도 다양한 주체들의 땅이 존재했습니다. 국유지 3필지, 공동소유지 3필지, 법인 소유지 20필지. 이 필지들이 당시 원효로3가가 단순한 전통 마을을 넘어서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법인 소유지 20필지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다른 마을들과 비교해도 이례적으로 많은 수입니다. 학교, 교회, 일본 기업, 혹은 단체 시설. 1912년 원효로3가에 이미 20필지의 법인 소유지가 있었다는 것은 근대적 토지 관리 개념이 이 마을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공동소유지 3필지는 마을 주민들이 함께 관리하고 사용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제사를 지내거나 공동 작업을 하고, 마을 회의를 열던 이 공간은 개인도 국가도 아닌 공동체 전체의 것이었습니다. 법인 소유지의 급증과 공동소유지의 작은 비중은,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 구조가 근대적 개인·법인 소유 체계로 전환되고 있던 과도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SECTION 08
일본인 54필지 — 이 시리즈 최대 규모의 식민지 그림자
이제 원효로3가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을 마주할 차례입니다. 일본인 소유지 54필지. 이 숫자는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모든 마을 중 단연 최대 규모입니다.
시리즈 비교 — 일본인·동척 소유지 규모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일본인 소유지 현황을 비교하면 원효로3가의 54필지가 얼마나 충격적인 수치인지가 드러납니다. 합정동 1필지, 구로동 13필지, 이태원동 36+동척 36필지, 이촌동 48필지, 원효로4가 39필지. 그리고 원효로3가 54필지. 용산구 일대, 특히 원효로 구역이 일본의 서울 토지 수탈에서 핵심 지역이었음을 이 숫자들이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땅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소유권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원효로3가에서 확인된 54필지는 그 정책의 구체적 결과입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 54필지 중 상당수가 대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즉, 조선인들이 살던 집터를 일본인들이 매입하거나 강제로 취득했다는 뜻입니다.
땅을 잃은 조선인들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임금 노동자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나는 이 토지 기록은, 그 시대의 사회적 아픔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자료입니다. 아픈 역사일수록 더 정확하게 기록해야 합니다.

SECTION 09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로 되살아나는 기록
1912년 원효로3가의 294필지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원효로3가는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마을들 중 가장 복잡한 역사 층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인의 집터 유구, 일본식 건물의 잔재, 법인 시설의 구조물, 도로부지의 흔적이 같은 지층 안에 겹겹이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이루어진 여러 지표조사에서는 이른바 "사라진 마을"이 다시 드러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집터의 기초, 도로 흔적, 토기 파편, 묘역의 구조. 이런 것들이 100년 전 원효로3가의 삶을 다시 눈앞에 펼쳐놓는 것입니다.
원효로3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도로부지 2필지의 위치와 연결 구조, 사사지의 묘역 흔적, 법인 소유지 20필지의 건물지 유구, 일본인 소유지 54필지의 건축 양식 잔재를 추적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의 단계적 접근을 통해, 조선과 근대, 식민지가 교차하는 원효로3가의 복합 역사를 온전히 복원할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01 — 인사동 금속활자, 지표조사가 역사를 구하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된 덕분에,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 귀중한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원효로3가의 270필지 대지도 이와 유사하게 체계적인 지표조사 선행이 이루어진다면,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의 생활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 용산 일대 다층 역사 유구 발굴
용산구 일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들에서 조선시대 생활 유구와 일제강점기 건물지가 같은 지점에서 중첩 출토된 사례가 있습니다. 원효로3가처럼 조선인 가문과 일본인 소유지가 뒤섞인 지역에서는 이런 다층 발굴이 더욱 풍부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두 시대의 기억이 하나의 발굴 현장에서 동시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SECTION 10
마무리 — 오늘의 용산, 과거에서 배우는 미래
1912년 원효로3가의 294필지는 단순한 토지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과 땅이 함께 살아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 270필지의 집터에서 펼쳐지던 삶, 2필지 도로부지의 골목에서 교차하던 발걸음, 16필지의 밭에서 자라던 곡식, 54필지를 잠식해 들어온 식민지의 그림자까지. 이 모든 이야기가 원효로3가의 땅 아래에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원효로를 걸을 때 느끼는 도심의 활기 속에도 100년 전 사람들의 발자국이 겹쳐져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길 밑, 우리가 사는 집터 밑에는 수백 년의 역사가 잠들어 있고, 그것을 깨워내는 일이 곧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원효로3가의 기록은 우리에게 단순히 과거를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줍니다. 그 땅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294필지의 기억이지금 당신의 발 아래에서 기다린다"
김씨 52필지의 집터, 박씨 31필지의 골목, 이씨·최씨·전씨 가문의 이웃이 모여 살던 그 마을 안에, 54필지의 일본인 소유지가 조용히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도로부지의 골목을 오갔던 발걸음, 사사지 앞에서 절을 올리던 손길, 16필지의 밭에서 자라던 채소.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거리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이야기를 세상으로 다시 불러내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의 첫 번째 단계는 언제나 기록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원효로3가의 294필지는 오늘도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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