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원효로2가의 토지와 생활상 ― 집, 길, 땅의 기록
- 2025년 8월 1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 역사
원효로2가, 96필지가 품은 1912년의 풍경집·길·산·사찰·밭이 뒤섞인 땅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말하다
용산구 원효로2가 · 96필지 · 105,686㎡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지금 우리가 걷는 도심의 한복판이, 100년 전만 해도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믿어지나요?
1912년 용산구 원효로2가. 지금의 빽빽한 건물과 도로 대신, 이 96필지의 땅 위에는 골목마다 집이 늘어서고, 사람들이 오가던 흙길이 있고, 마을의 정신적 중심인 사사지가 있었으며, 작은 숲과 단 1필지의 밭까지 공존하던 전혀 다른 세계가 있었습니다. 도시가 쌓아 올려진 시간의 무게 속에서 1912년 원효로2가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이 오늘 밟고 있는 땅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목차
1912년 원효로2가 — 96필지의 전체 풍경
78필지의 대지 — 골목마다 이어진 사람들의 삶
5필지의 도로부지 — 마을을 잇던 길 위의 역사
2,284㎡의 사사지 — 마을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공간
2필지의 임야 — 도심 속 마을을 지켜낸 자연의 숨결
9필지의 잡종지 — 살아있는 공간, 다양한 쓰임의 땅
단 1필지의 밭 — 작은 땅이 지닌 큰 의미
여섯 가지 땅이 만든 하나의 마을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원효로2가의 과거
마무리 — 서울 원효로의 기억이 오늘날 주는 메시지

SECTION 01
1912년 원효로2가 — 96필지의 전체 풍경
용산구 원효로2가. 원효로3가(294필지), 원효로4가(170필지)와 함께 원효로 일대를 이루는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원효로2가는 총 96필지, 105,686㎡의 땅이었습니다.
96필지. 이 시리즈의 다른 마을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작은 필지 수입니다. 그러나 원효로2가 기록이 특별한 이유는 그 다채로운 구성에 있습니다. 집터(대지), 도로부지, 사사지, 임야, 잡종지, 그리고 밭. 이 여섯 가지 서로 다른 성격의 땅이 96필지 안에 촘촘하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의 다양성이 1912년 원효로2가가 얼마나 복합적인 생활 공간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원효로2가는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도로부지, 임야, 잡종지, 밭이 한꺼번에 기록된 마을입니다. 이 다양한 지목들이 한 마을 안에 공존했다는 것은, 원효로2가가 완전한 농촌도, 완전한 도시도 아닌 독특한 과도기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96총 필지 수
105,686㎡총 면적
78대지 필지 수
9잡종지 필지 수
5도로부지 필지
6다양한 지목 종류
SECTION 02
78필지의 대지 — 골목마다 이어진 사람들의 삶
원효로2가 96필지 중 78필지, 77,230㎡가 대지였습니다. 전체의 81%에 해당하는 이 비율은 원효로2가가 주거 중심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시리즈에서 원효로3가(92%), 원효로4가(95%)와 비교할 때 조금 낮지만, 여전히 원효로 일대의 강한 주거 밀집 특성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78채의 집. 기와집과 초가집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서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고, 마루에는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흙길, 빨래가 드리워진 처마 끝, 저녁이면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 지금의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그러나 그것이 세상의 전부였던 78개의 집이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 1912년 원효로2가의 어느 저녁해 질 무렵, 골목마다 등불이 켜집니다. 기와집 처마 아래 제비 둥지에서 새끼들이 재잘거리고, 초가집 마당에서는 저녁 준비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웃집 할머니가 담장 너머로 호박을 건네고,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다 쫓겨납니다. 78필지의 집터에서 78개의 다른 저녁이 동시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78필지의 대지는 핵심 조사 구역입니다. 기와 조각, 백자 파편, 건물 기초 구조물, 우물터, 아궁이 잔재가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같은 원효로 구역의 원효로3가(270필지)와 원효로4가(162필지)가 모두 풍부한 발굴 가능성을 품고 있는 만큼, 원효로2가의 78필지도 그 잠재력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SECTION 03
5필지의 도로부지 — 마을을 잇던 길 위의 역사
원효로2가에는 5필지, 4,955㎡의 도로부지가 있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도로부지가 기록된 마을은 원효로3가(2필지)와 원효로2가(5필지)뿐입니다. 원효로 일대가 다른 마을들과 달리 이미 1912년에 도로 체계를 갖추어 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1912년 원효로2가의 길이 담은 것당시의 도로부지 4,955㎡는 지금의 인도 하나와 비슷한 규모입니다. 하지만 이 길이 당시 사람들에게 지닌 의미는 훨씬 컸습니다. 시장을 오가는 길, 이웃 마을로 연결되는 길,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등하굣길. 오늘날 수많은 차량이 오가는 원효로의 전신이 바로 이 흙먼지 날리는 5필지의 도로부지였습니다. 도로는 단순한 통행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혈관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도로부지는 흥미로운 유구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차 바퀴 자국이 남은 길바닥 흔적, 배수로의 석재, 길목에 세웠던 표지물의 잔재 등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원효로2가의 5필지 도로부지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추적한다면, 1912년 원효로2가의 마을 구조 전체를 지도처럼 복원하는 핵심 단서가 될 것입니다.
SECTION 04
2,284㎡의 사사지 — 마을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공간
원효로2가에는 1필지, 2,284㎡의 사사지가 있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등장한 사사지들 중 2,284㎡는 상당히 큰 규모입니다. 이촌동(314㎡), 창전동(158㎡), 하중동의 사사지와 비교할 때, 원효로2가의 사사지는 작은 암자 수준을 넘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사찰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공간은 단순한 제례나 불교 의식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중요한 결정을 의논하거나, 어려운 시기에 함께 기도를 올리고, 평소에는 마을의 이야기가 오가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그 사사지는 1912년 원효로2가 사람들에게 큰 위안과 의미를 주었을 것입니다.
2,284㎡의 사사지는 문화재 발굴에서 불상 파편, 기와, 청동 제기류, 사찰 건물지 유구가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핵심 구역입니다. 원효로2가의 사사지 규모가 이 시리즈의 다른 마을들보다 크다는 사실은, 이 지역 불교 문화의 규모와 깊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지표조사에서 이 구역을 우선 살피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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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05
2필지의 임야 — 도심 속 마을을 지켜낸 자연의 숨결
원효로2가에는 2필지, 4,975㎡의 임야가 있었습니다. 78필지의 집터가 빼곡하게 들어선 주거 밀집 지역에서, 약 1,500평의 숲과 언덕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임야는 마을이 완전히 도시화되기 전의 마지막 자연 흔적이었습니다.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지나가는 이 작은 숲에서, 아이들이 계절마다 다른 놀이를 하고,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산책하고, 나무꾼이 땔감을 구하러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고층 건물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지만, 불과 113년 전만 해도 원효로2가에는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임야 구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의 직접적인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 구역에는 더 온전한 형태의 고고학적 층위가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숯 가마 터, 목재 저장 구조물, 임야와 대지의 경계를 표시하던 석재들이 발굴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SECTION 06
9필지의 잡종지 — 살아있는 공간, 다양한 쓰임의 땅
원효로2가에서 흥미로운 지목 중 하나가 잡종지 9필지, 16,019㎡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잡종지 9필지는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창전동(6필지), 원효로3가(4필지), 이촌동(5필지)보다 많은 수입니다. 원효로2가에 이렇게 많은 잡종지가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잡종지는 용도가 고정되지 않은 유연한 땅이었습니다. 임시 창고, 공동 작업장, 아이들의 놀이터, 장터, 혹은 아직 개발이 결정되지 않은 예비 공간. 이 9필지의 잡종지는 1912년 원효로2가가 빠르게 변화하던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아직 용도가 확정되지 않은 공간들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쓰임을 바꾸며 살아있던 공간들이었습니다.
잡종지 구역은 문화재 발굴에서 예측하기 어렵지만 때로 가장 흥미로운 발견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용도가 다양했던 만큼 다양한 시대의 유물이 혼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창고 터, 공동 공간의 바닥 구조물, 임시 시설의 기초 흔적이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 있어 발굴 과정이 특히 세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구역입니다.
SECTION 07
단 1필지의 밭 — 작은 땅이 지닌 큰 의미
원효로2가의 96필지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작은 필지입니다. 단 1필지, 221㎡의 밭. 약 67평에 불과한 이 작은 밭이 1912년 원효로2가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 1필지의 밭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78필지의 집터와 9필지의 잡종지가 가득한 주거 밀집 지역에서, 단 하나의 밭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완전히 도시화되기 직전의 마지막 농경 흔적. 혹은 마을 주민 누군가가 집 앞 작은 텃밭을 고집스럽게 지키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옥상 텃밭처럼, 도시 한복판에서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는 작은 저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1필지, 221㎡의 밭은 크기는 작지만 그것이 전하는 이야기는 큽니다.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누군가 땅과 연결되어 살아가려 했던 의지, 그리고 완전한 도시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숨결. 이 작은 밭이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SECTION 08
여섯 가지 땅이 만든 하나의 마을
원효로2가의 96필지를 지목별로 정리해 보면, 이 마을이 얼마나 다채로운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가 한눈에 드러납니다.
대지78필지77,230㎡
사람이 살던 집터
잡종지9필지16,019㎡
유연한 다목적 공간
도로부지5필지4,955㎡
마을을 연결한 길
임야2필지4,975㎡
자연의 마지막 흔적
사사지1필지2,284㎡
마을의 정신적 중심
밭1필지221㎡
마지막 농경의 흔적
이 여섯 가지 지목이 한 마을 안에서 공존했다는 것은, 원효로2가가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를 넘어선 복합적인 생활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집이 있고, 길이 있고, 신앙의 공간이 있고, 자연이 있고, 생업의 공간이 있고, 유연한 공용 공간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96필지 안에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SECTION 09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원효로2가의 과거
1912년 원효로2가의 96필지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원효로2가는 다양한 지목의 공존이라는 특성 덕분에, 다른 마을들보다 더욱 복합적이고 풍부한 발굴 성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78필지의 대지 아래에는 생활 유구가, 2,284㎡의 사사지에는 불교 관련 유물이, 5필지의 도로부지 위치에는 마을 구조 복원의 단서가, 2필지의 임야에는 목재 활용의 흔적이, 그리고 9필지의 잡종지에는 예측 불가능한 다양한 시대의 유물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 1필지의 밭 아래에는 이 도시화의 과도기를 살아간 누군가의 마지막 농경 흔적이 보존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원효로2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사사지(2,284㎡)와 임야(4,975㎡) 구역을 우선 살피고, 이어서 도로부지 5필지의 위치를 파악해 마을 구조를 복원하는 전략이 효과적입니다.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의 단계적 접근을 통해, 여섯 가지 지목이 공존했던 원효로2가의 복합적 역사를 온전히 복원할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01 — 서울 청진동 발굴조사, 도시의 뿌리를 재조명하다
현대적 건물이 들어서기 전 청진동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생활 유구와 건물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발굴은 도시의 뿌리를 재조명하게 했고, 도시 개발과 문화재 보존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원효로2가도 이와 유사하게, 체계적인 지표조사가 선행된다면 서울 도심 속 잊혀진 마을의 이야기가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 인사동 금속활자, 지표조사가 역사를 구하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된 덕분에,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와 과학 기기가 출토되었습니다. 원효로2가의 사사지(2,284㎡)는 이와 유사하게,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상당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불교 관련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SECTION 10
마무리 — 서울 원효로의 기억이 오늘날 주는 메시지
1912년 원효로2가의 96필지는 단순한 토지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집이 있고, 길이 있고, 신앙의 공간이 있고, 자연이 있고,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변화를 겪던 한 마을의 생생한 초상화입니다. 이 여섯 가지 땅이 만들어낸 하나의 마을이 지금 우리가 걷는 원효로 위에 겹겹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요. 100년 후 누군가가 오늘의 기록을 다시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어떤 풍경을 남겨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땅은 단순한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그 속에 수백 년의 삶과 이야기를 품은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원효로2가의 96필지가 지금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땅을 걸을 때, 잠깐 멈추고 발 아래 잠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그 작은 관심이 역사를 지키는 첫 번째 힘입니다.

"96필지의 기억이여섯 가지 얼굴로 당신을 기다린다"
78필지의 집터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5필지의 길 위에서 오가던 발걸음, 2,284㎡의 사사지에서 올리던 기도, 4,975㎡의 임야에서 들리던 새소리, 16,019㎡의 잡종지에서 펼쳐지던 공동체의 활기, 그리고 221㎡의 밭에서 자라던 마지막 작물.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거리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잠든 이야기들을 세상으로 불러내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의 시작은 언제나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은 것은, 원효로2가의 기억을 되살리는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원효로2가의 96필지는 오늘도당신의 발 아래에서 여섯 가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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