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원효로2가의 토지와 생활상 ― 집, 길, 땅의 기록
- 서울 HI
- 8월 17일
- 2분 분량
목차
1912년, 용산구 원효로2가의 풍경을 열다
집이 있던 땅, 사람들이 살아가던 자리
길 위의 역사, 도로부지가 남긴 흔적
사사지를 통해 본 종교와 생활의 공간
산과 임야, 마을의 숨결을 지켜낸 자연
잡종지의 의미, 다양한 쓰임의 토지
밭에서 피어난 삶, 작은 땅이 지닌 가치
당시 풍경을 그려보며 오늘을 생각하다
문화재 조사와 발굴, 기록의 힘
서울 원효로의 기억이 오늘날 주는 메시지

1912년의 원효로2가를 상상해보세요. 지금 우리가 걷는 도시의 한복판이,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꽤나 놀랍습니다.
그 시절 용산구 원효로2가는 96필지, 약 105,686㎡의 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땅이 모두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집이 들어선 대지, 사람들이 오가던 길, 종교와 의례가 이어지던 사사지, 그리고 산과 밭까지. 각각의 땅은 제 역할을 하며 당시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지탱했습니다. 지금은 빽빽한 건물과 도로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1912년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도시가 쌓아 올려진 시간의 무게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2장에서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당시 원효로2가에는 총 78필지, 77,230㎡의 대지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면 작은 규모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 겁니다. 좁은 골목마다 줄지어 선 집들, 마당에 심겨 있었을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아이들이 뛰놀던 흙길이 어렴풋이 그려집니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와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그 공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전부였을 것입니다.
3장은 도로의 기록을 살펴봅니다. 원효로2가에는 5필지, 약 4,955㎡의 도로부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차량이 오가는 도로와는 달리, 당시의 길은 흙먼지가 일던 소박한 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길을 통해 시장을 오가고, 이웃을 만나며, 또 다른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도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도시의 숨결을 불어넣는 혈관과도 같았습니다.
4장에서는 사사지, 즉 종교적 의미가 있는 땅을 짚어봅니다. 원효로2가에는 단 1필지, 2,284㎡의 사사지가 있었습니다. 이 공간은 단순히 제례나 종교 활동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모임터이자 정신적인 중심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곳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위안과 의미를 주었을 겁니다.
5장은 임야입니다. 원효로2가에는 2필지, 4,975㎡의 산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고층 건물이 들어선 그 자리에도 한때는 숲과 언덕이 있었고, 아이들이 뛰어놀며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자연이 있었습니다. 작은 임야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새소리와 바람, 그리고 사람들의 쉼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6장은 잡종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무려 9필지, 16,019㎡의 잡종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잡종지란 특정한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땅으로, 때로는 창고로, 때로는 임시 경작지로, 혹은 공동 공간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땅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의 창의성과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했던 ‘살아있는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7장에서는 밭을 이야기합니다. 단 1필지, 221㎡. 아주 작은 규모였지만, 그곳에서 자라난 작물은 가족들의 식탁을 채워주었을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옥상 텃밭과 비슷한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크지 않았지만, 그 작은 땅이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1912년의 원효로2가는 집, 길, 산, 사사지, 밭, 그리고 잡종지로 나뉘어 존재했습니다. 단순한 땅의 분류 같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문화재지표조사나 시굴조사를 통해 이런 기록이 다시 드러나고, 우리가 잊어버린 과거를 복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서울 곳곳에서 발굴된 작은 유물 하나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보여주듯, 원효로2가의 땅 기록도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증언입니다.
성공사례로 서울의 다른 지역, 예컨대 청진동 발굴조사를 들 수 있습니다. 현대적 건물이 들어서기 전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은 도시의 뿌리를 재조명하게 했고, 도시 개발과 문화재 보존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원효로2가의 기록 역시 그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100년 후 누군가가 오늘의 기록을 다시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어떤 풍경을 남겨줄 수 있을까요?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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