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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용산구 용산동 시간 여행의 출발

2025년 8월 7일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용산 역사

지금 당신이 밟는 땅 아래에


무덤이, 밭이, 철도의 흔적이 잠들어 있다


— 1912년 용산구 용산동 449필지, 시대의 격전장을 기록하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용산. 이 두 글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나요?



미군 기지? 재개발 이슈? BTS 콘서트? 아니면 오랫동안 가슴 어딘가에 걸려 있는 역사의 상처?



그런데 1912년 용산동을 들여다보면, 이 모든 풍경 이전의 풍경이 보입니다. 183필지의 밭, 52필지의 논, 51필지의 무덤. 그리고 그 위를 덮기 시작한 일본인 56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37필지의 그림자.



역사는 책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용산동 땅 아래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449필지

1912년 용산동


총 필지 수

674,538㎡

전체 토지


총 면적

93필지

일본인+동척


소유 합산


목 차

1.시간 여행의 출발 — 1912년 용산동의 첫인상

2.용산동 1912년 토지 총정리

3.논·밭·대지·분묘·사사지 — 용도별 심층 분석

4.성씨와 외국인, 법인들의 땅 소유 구조

5.문화재 조사와 땅의 역사 연결하기

6.성공 사례 — 시굴·지표·발굴조사의 실제 성과

7.조사 의뢰의 길 — 기관과 절차 안내

8.왜 지금 이 정보가 중요한가


01

시간 여행의 출발 — 1912년 용산동의 첫인상

용산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건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강변에 자리 잡은 이 땅은 수백 년 동안 조선의 물류 기지였고, 한양 도성의 물자가 드나드는 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912년, 일제강점기 2년 차를 맞은 용산동은 그 오랜 역사 위에 완전히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는 격변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449필지, 674,538㎡. 이 숫자를 처음 보면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상상해봅시다. 축구장 약 94개를 합쳐 놓은 넓이. 그 안에 논이 있고, 밭이 있고, 집이 있고, 무덤이 있고, 사찰 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서부터 일본의 손길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용산에 군사기지를 세웠습니다. 1905년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가 연결되며 용산역이 군용·민간 철도의 핵심 거점이 되었죠. 1907년에는 용산동인병원(훗날의 철도병원)이 들어섰습니다. 1912년의 토지 기록은 바로 이 변화의 한가운데를 포착한 스냅샷입니다.



02

용산동 1912년 토지 총정리

449필지 674,538㎡라는 규모는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동네들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합니다. 아현동 591필지보다 필지 수는 적지만 면적은 훨씬 넓습니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크다는 건, 용산동의 일부 토지가 상당히 넓은 단위로 쪼개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군사 시설, 철도 관련 부지, 대규모 농지 같은 것들이 그 이유였을 겁니다.

674,538㎡라는 면적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지금의 용산 미군기지 반환 부지가 약 243만㎡인데, 1912년 용산동은 그 약 4분의 1 규모입니다. 작지 않습니다. 그 넓은 땅에 449개의 다른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03

논·밭·대지·분묘·사사지 — 용도별 심층 분석

1912년 용산동의 토지를 용도별로 쪼개보면, 이 마을이 얼마나 복합적인 공간이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

전체 비중

밭

183

352,001

52.2%

논

52

130,549

19.4%

분묘지

51

122,638

18.2%

대지

161

66,268

9.8%

사사지

1

11,196

1.7%

잡종지

1

1,884

0.3%

밭이 183필지, 352,001㎡로 전체 면적의 절반을 넘습니다. 용산동은 1912년 당시 여전히 농업이 중심인 마을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밭들에서는 보리, 콩, 무, 배추가 자랐고, 봄이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거두는 농사의 리듬이 마을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끄는 숫자가 있습니다. 분묘지가 51필지, 122,638㎡. 아현동(14필지 46,919㎡)보다도 훨씬 큰 규모입니다. 면적으로 치면 전체의 약 18%. 용산동 거의 5분의 1이 무덤 자리였다는 뜻입니다. 이 무덤들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의 가문 역사였고, 기억의 저장소였습니다.

지금 당신이 밟는 용산동의 그 길 아래, 누군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봄이면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가을이면 성묘 행렬이 이어지던 그 공간. 지금은 아파트 단지 주차장이 된 그 자리에서, 조선시대 도자기 조각이 출토되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산동에서 발굴조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발굴이 시작되는 첫걸음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사사지(寺祠地) 1필지, 11,196㎡도 흥미롭습니다. 절이나 사당의 부지였을 이 땅은, 용산이 오래전부터 불교 및 민간 신앙과 연결된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용산 일대에는 묘법사, 유림사, 보덕사 같은 사찰들이 자리를 잡아왔습니다. 이 1필지가 어느 사찰의 부지였는지도 지표조사와 문헌 조사를 통해 밝혀낼 수 있습니다.



04

성씨와 외국인, 법인들의 땅 소유 구조

1912년 용산동 449필지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조선인 성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김씨

106필지

이씨

47필지

윤씨

45필지

천씨

14필지

박씨

11필지

일본인

56필지

동척

37필지

김씨 106필지, 이씨 47필지, 윤씨 45필지. 조선인 최다 소유 성씨들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들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이 눈에 박힙니다. 윤씨가 이씨와 거의 같은 규모인 45필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산 일대에 윤씨 집성촌이 있었거나, 유력한 윤씨 가문이 대대로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천씨(天氏)라는 다소 희귀한 성씨가 14필지를 소유한 것도 이채롭습니다.

⚠️ 충격적 사실: 일본인 56 + 동척 37 = 93필지

449필지 중 무려 93필지, 전체의 20.7%가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였습니다. 이는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다른 동네들과 비교해도 가장 높은 비율입니다. 용산이 당시 일본의 군사·철도 기지로 개발되면서 토지 수탈도 그만큼 체계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동척 37필지는 주목해야 합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당시 조선 전체 농지의 12.3%를 소유한 최대 지주였습니다. 그들이 용산동에서만 37필지를 확보했다는 건, 이 지역 농지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드넓은 밭과 논은 소작농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핵심 자산이었습니다.

20.7%

일본인+동척


필지 비율

37필지

동척 소유


용산동 토지

56필지

일본인 개인


소유 필지



05

문화재 조사와 땅의 역사 연결하기

1912년 용산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한 역사 자료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설계하는 데 직접 활용되는 나침반입니다.

예를 들어 51필지, 122,638㎡에 달하는 분묘지는 발굴조사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구역입니다. 무덤 터에는 조선시대 도자기, 비석 파편, 부장품, 심지어 건물 기초까지 다양한 유물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183필지의 밭 터는 농기구 잔해, 씨앗 흔적, 수로 구조물 같은 농업 관련 유구의 보고(寶庫)가 될 수 있습니다.

동척과 일본인 소유 필지들이 집중된 구역에서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건물 기초, 군사 시설 흔적, 혹은 철도 관련 구조물이 발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처럼 1912년 토지 기록이라는 지도를 손에 쥐고 발굴에 임하는 것과, 아무 정보 없이 삽을 드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이 모든 발굴 과정의 첫 단계입니다. 땅 표면을 살피고 기존 기록을 검토해 발굴 필요성과 범위를 판단합니다. 이 단계를 생략하면 공사 삽날에 수백 년 된 유구가 영원히 파괴될 수 있습니다. 용산동처럼 분묘지와 농경지가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지역일수록 이 첫 단계가 더욱 중요합니다.


06

성공 사례 — 시굴·지표·발굴조사의 실제 성과

용산 일대의 문화재 조사는 실제로 굵직한 성과를 여럿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용산철도병원 복원 — 역사가 박물관이 되다

1907년 일본이 설립한 용산동인병원을 모태로 한 용산철도병원은 1928년 철근콘크리트조 적벽돌 건물로 재건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방치되다가 문화재청 근대문화재분과위원회의 심의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용산역사박물관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역사적 건물을 허물지 않고 보존한 모범 사례입니다.

🔍

한남동 토지 기록 기반 발굴 조사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인근 용산구 한남동에서 수행한 1912년 토지 기록 분석에서, 당시 농경지와 분묘지의 위치를 특정하고 발굴 우선 구역을 선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방식은 용산동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접근법으로, 토지 기록과 지표조사를 결합했을 때의 시너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용산 철도 관련 유구 발굴 성과

용산 일대 재개발 과정에서 진행된 발굴조사들에서 일제강점기 철도 기지 시대의 건물 기초, 배수로, 생활 유물들이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1912년 토지 기록에서 대지와 잡종지로 분류된 구역들이 실제 발굴에서 그 용도가 확인되는 사례들입니다. 이러한 근현대 유구들은 용산의 도시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핵심 자료가 됩니다.



07

조사 의뢰의 길 — 기관과 절차 안내

문화재 조사를 의뢰하는 절차가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계별로 이해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1

문화재 지표조사

개발 예정 부지의 역사 기록과 지표면을 검토합니다. 유적 존재 가능성을 판단하는 첫 단계로,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자료가 핵심 참고 자료로 활용됩니다.

2

표본조사 또는 시굴조사

지표조사에서 유적 가능성이 확인되면, 면적의 2%(표본) 또는 10%(시굴) 이내 범위에서 실제 굴착해 유구를 확인합니다. 국가유산청 허가 없이 해당 지자체 지시에 따라 진행합니다.

3

정밀 발굴조사

시굴조사에서 의미 있는 유구가 확인되면 국가유산청 발굴허가를 받아 정밀조사를 진행합니다. 이 단계에서 유물 수습, 유구 실측, 보고서 작성이 이뤄집니다.

4

의뢰 방법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 또는 국가유산청 통합 발굴허가 시스템(e-minwon.go.kr)을 통해 의뢰할 수 있습니다. 조사 목적, 면적, 예산을 포함해 제출하면 됩니다.

📋

알아두세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면적 이상의 개발 사업에는 문화재 지표조사가 법적 의무입니다. 이를 생략하면 수백 년 된 유구가 공사 과정에서 영구적으로 파괴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법적 제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용산동처럼 분묘지와 농경지가 광범위하게 분포한 지역에서는 조사 없이 공사를 진행하는 것 자체가 큰 위험입니다.


08

왜 지금 이 정보가 중요한가

용산은 지금 또 한 번 거대한 변화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미군 기지 반환 부지 개발, 용산 국제업무지구 조성, 한남동·용산동 일대 재개발. 크고 작은 공사 계획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공사들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가? 1912년의 51필지 무덤 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동척이 수탈했던 37필지의 밭에서는 어떤 유물이 잠들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시굴조사이고, 발굴조사입니다.

용산동의 땅 아래에는 조선 농민의 기억이 있고, 수탈당한 자의 한이 있으며, 철도를 놓던 노동자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같은 땅 위에 서도 전혀 다른 도시를 만들게 됩니다. 역사를 아는 개발이 더 나은 도시를 만든다는 건, 막연한 낭만이 아니라 검증된 사실입니다.



용산동의 역사가 공사 삽날에 사라지기 전에.

분묘지 51필지, 밭 183필지가 펼쳐져 있던 용산동.개발 전 문화재 지표조사는 의무이자, 이 땅의 기억을 지키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바로가기 →

🚂

철도가 놓이기 전,그 땅에는 먼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1912년 용산동에서 밭을 갈던 농민, 무덤 앞에 절을 올리던 후손들.그들은 누구도 이 땅이 군사기지가 되고, 철도 기지가 되고,훗날 아파트 단지가 되리라고는 몰랐을 겁니다.하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아직 이 땅 아래에 있습니다.발굴조사는 그 흔적을 찾아내어, 그들이 여기 있었음을 세상에 알리는 일입니다.지금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이,그 일의 첫 번째 목격자입니다.이 글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역사 보존의 한 페이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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