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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동교동의 풍경,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까요?

  • 2025년 5월 10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 기관 ·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홍대 앞,100년 전엔 논이었다

1912년 동교동 — 논 162,856㎡, 밭 111,362㎡, 무덤 6,776㎡. 지금 당신이 커피를 마시는 그 자리의 충격적인 과거

지금 홍대 앞 카페에서커피를 마시고 있다면,잠깐 발 아래를 생각해봐라.100년 전, 거기서 벼가 자라고 있었다.

홍대입구역 2번 출구. 매일 수만 명이 오가는 그 계단 아래, 1912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클럽도 없었고, 갤러리도 없었고, 인스타그램도 없었다. 대신 논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누군가의 무덤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49필지 162,856㎡의 논. 57필지 111,362㎡의 밭. 2필지 6,776㎡의 무덤. 그리고 오씨, 고씨, 김씨, 차씨가 일군 이 땅의 이야기. 문화재 발굴 기관이 꺼낸 동교동의 100년 전 민낯을 지금 공개한다.


목 차

  1. 프롤로그 — 홍대 앞에서 시간을 거슬러

  2.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1912년의 동교동

  3. 논 49필지 — 162,856㎡의 벼 이야기

  4. 대지 26필지 — 26개 삶의 터전

  5. 무덤 6,776㎡ — 도심 아래 잠든 기억

  6. 임야 2,353㎡ — 마지막 남은 숲의 흔적

  7. 밭 57필지 — 동교동을 먹여 살린 땅

  8. 성씨로 읽는 동교동 사람들

  9. 지금의 홍대와 100년 전 동교동 사이

  10. 문화재 지표조사, 왜 지금 여기서 필요한가

  11.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12. 에필로그 — 거리 아래 흐르는 시간



SECTION 01

1. 프롤로그 — 홍대 앞에서 시간을 거슬러

홍대 앞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으로 특정 이미지가 떠오른다. 주말 밤의 인파, 골목마다 흘러나오는 음악, 알록달록한 간판들, 그리고 손에 손을 잡고 걷는 젊은이들. 서울에서 가장 활기차고 가장 빠르게 돌아가는 거리 중 하나다.

그런데 그 모든 활기 아래, 아스팔트와 지하철 터널 아래, 지금으로부터 약 110년 전의 기억이 층층이 쌓여 있다. 1912년의 동교동. 일제강점기 초반,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전역에 걸쳐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던 그 시절, 지금의 홍대 앞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동교동 토지 기록은 이 지역이 당시 얼마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는지를 숫자로 증명한다. 논, 밭, 무덤, 임야, 대지. 지금은 상상조차 어려운 풍경들이 이 기록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따라가면, 지금 우리가 걷는 거리가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SECTION 02

2.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1912년의 동교동

문화재 지표조사란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의 역사를 먼저 읽는 작업이다. 옛 문헌, 지적도, 고지도를 교차 분석하고 지표면에서 확인 가능한 흔적들을 수집하여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판단하는 과정이다. 이 조사가 먼저 이루어져야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격 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다.

동교동의 1912년 데이터는 서울 마포구 지역 중에서도 특히 논과 밭의 비중이 높은 편에 속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논 49필지162,856㎡

밭 57필지111,362㎡

대지 26필지21,381㎡

무덤 2필지6,776㎡

임야 1필지2,353㎡

오·고·김·차씨주요 토지 소유

이 숫자들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동교동이 철저히 농업 중심 마을이었다는 사실이다. 논과 밭을 합산하면 274,218㎡로, 여의도 공원 면적(229,539㎡)을 훌쩍 넘는다. 지금의 홍대 상권 전체를 덮고도 남을 규모의 농지가 100년 전 이 땅에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SECTION 03

3. 논 49필지 — 162,856㎡의 벼 이야기

49필지, 162,856㎡의 논. 이 숫자를 현재 감각으로 환산하면 홍대입구역에서 합정역까지 이어지는 도로 양쪽을 모두 덮는 면적과 비슷하다. 지금 그 자리에는 카페, 음식점, 편의점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지만, 1912년에는 물이 찰랑대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동교동에 논이 이렇게 많았던 이유가 있다. 지형적으로 마포구 일대는 한강과 가깝고, 홍제천을 비롯한 지류들이 서쪽에서 흘러들어 오는 구조다. 물이 풍부한 지역에서 논농사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봄이면 모내기 준비로 마을이 분주해지고, 여름이면 초록 벼가 바람에 흔들리고, 가을이면 황금빛 수확이 이루어지는 그 리듬이 동교동을 관통했을 것이다.

49개의 논 필지 각각에 농부가 있었고, 그 농부들 각각에 가족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논두렁을 걷고, 물꼬를 트고, 잡초를 뽑고, 해가 질 때야 집으로 돌아오는 삶. 그 삶이 162,856㎡의 논 위에서 매년 반복됐다. 지금 그 위를 걷는 사람들 중 이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홍대 앞 클럽 음악 대신, 1912년 동교동에는 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밤을 채웠을 것이다. 같은 땅, 전혀 다른 세계."


SECTION 04

4. 대지 26필지 — 26개 삶의 터전

대지 26필지, 21,381㎡. 논과 밭의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지만, 이 26필지가 바로 동교동의 심장이었다. 사람이 살았던 공간. 집이 있었던 자리.

26필지를 단순히 숫자로 보지 말고, 26개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각각의 집에 다른 가족이 살았고, 다른 이야기가 있었고, 다른 웃음과 눈물이 있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고, 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삶의 전 과정이 이 26필지 위에서 펼쳐졌다.

면적으로 환산하면 한 필지 평균 약 823㎡, 약 249평이다. 이것은 조선 후기와 근대 초기의 전통 주거 필지로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기와집이라면 사랑채, 안채, 마당을 모두 갖춘 구조가 가능한 크기고, 초가집이라면 큰 텃밭과 함께 넓게 쓸 수 있는 공간이다. 동교동의 26채 집들은 꽤 여유 있는 농가 구조였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의 관점에서 이 대지들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구역이다. 조선 말기와 근대 초기 주거지의 흔적, 즉 온돌 구조, 우물, 부뚜막, 생활 도자기 파편들이 그 자리에 아직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SECTION 05

5. 무덤 6,776㎡ — 도심 아래 잠든 기억

2필지, 6,776㎡의 무덤. 지금의 홍대 거리 어딘가에, 100년 전 누군가의 무덤이 있었다. 이 문장이 섬뜩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마을 근처의 언덕이나 야산 자락에 무덤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지역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 당시의 생활 문화였다. 동교동의 무덤 6,776㎡는 마을 어귀나 뒷산 자락에 자리했을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명절이면 이 무덤들에 제사를 지내러 왔을 것이다.

2필지 6,776㎡라는 규모는 소규모 집안 묘역에 해당한다. 여러 세대에 걸친 봉분들이 조성된 집안 선산, 또는 마을의 공동 묘역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 묘역에서는 도자기류, 금속 장신구, 목재 부장품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어,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그 무덤이 지금 무엇이 됐는지,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이장이 됐을 수도 있고, 개발에 의해 훼손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록은 남아 있다. 1912년 동교동의 어딘가에 6,776㎡의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이.

문화재 발굴에서 무덤이 중요한 이유


조선시대 묘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당시 사회 계층, 생활 수준, 복식 문화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특히 분청사기·백자·청동 유물은 제작 시기와 지역 특성을 반영합니다. 동교동처럼 마포구 일대는 한강 수운을 통한 도자기 유통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이 무덤에서 상당한 가치의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SECTION 06

6. 임야 2,353㎡ — 마지막 남은 숲의 흔적

1필지, 2,353㎡의 임야. 동교동의 지목 중 가장 면적이 작은 항목이다. 하지만 이 작은 숲이 마을에서 담당했던 역할은 면적 이상이었다.

임야는 마을의 생존 자원이었다. 땔감을 구하러 가고, 약초를 캐러 가고, 비가 오면 홍수를 막아주는 흡수 역할을 하는 숲. 동교동의 2,353㎡ 임야는 아마도 주거지 뒤편 언덕 자락의 작은 숲이었을 것이다. 지금 홍익대학교 캠퍼스가 자리한 언덕 부근이 이 임야의 흔적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홍익대학교가 1946년 설립된 이후 이 지역의 예술적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 대학교 부지 일부가 100년 전 동교동의 임야 자락 위에 걸쳐 있을 가능성이 있다. 숲이 예술가의 학교가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땅은 처음부터 뭔가 남다른 기운을 품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SECTION 07

7. 밭 57필지 — 동교동을 먹여 살린 땅

논이 162,856㎡로 면적이 더 크지만, 필지 수로는 밭이 57필지로 더 많다. 논보다 밭이 더 많은 필지에 걸쳐 있다는 것은, 농부 입장에서 밭농사가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운영됐음을 의미한다.

57필지, 111,362㎡의 밭에서는 어떤 작물이 자랐을까. 당시 마포 일대의 밭작물 기록을 보면, 콩, 보리, 기장, 조, 고추, 배추, 무, 고구마 등이 주를 이뤘다. 특히 마포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서울 도심에 채소를 공급하는 근교 농업 지대였다. 동교동의 밭에서 자란 배추와 무가 한양 도성 안 시장에 팔렸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57개의 밭 필지마다 다른 농부의 땀이 배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이슬을 맞으며 밭을 일구고, 뜨거운 여름 볕 아래 잡초를 뽑고, 가을이면 수확의 기쁨을 누리던 사람들. 지금 홍대 거리를 걷는 우리는 그들이 일군 땅 위에 서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경작지는 경작층이라는 특수한 지층을 형성한다. 수백 년에 걸쳐 반복된 경작 활동은 그 흔적을 토양 속에 새기는데, 씨앗, 화분, 농기구 파편, 토기 조각 등이 이 경작층 안에서 발견된다. 동교동의 57개 밭 자리 아래에는 조선시대 농업 생활의 증거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SECTION 08

8. 성씨로 읽는 동교동 사람들

이 모든 논과 밭, 집과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1912년 토지조사 기록에 남아 있는 성씨들을 통해 당시 동교동이 어떤 공동체였는지를 그려볼 수 있다.

성씨

소유 필지 수

특이 사항

오씨(吳)

22필지

최다 소유, 사실상 마을 중심

고씨(高)

20필지

2위, 오씨와 함께 양대 축

김씨(金)

18필지

전국 최다 성씨답게 여기도 존재

차씨(車)

11필지

독특한 성씨, 역사적 배경 주목

오씨 22필지, 고씨 20필지. 이 두 성씨가 동교동의 실질적인 양대 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씨는 서울 경기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터를 잡은 성씨 중 하나이며, 고씨 역시 한반도 서쪽 지역에 고르게 분포한 성씨다.

흥미로운 것은 차씨(11필지)의 존재다. 차씨는 연안 차씨가 주류를 이루는 비교적 소수 성씨인데, 조선시대 중인 계층이나 농업 종사자 집안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마포 일대의 차씨 가문은 한강 수운 관련 업종과 연결됐을 가능성도 있다. 마포 포구가 조선시대 서울의 주요 물류 기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근에 수운 관련 집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씨, 고씨, 김씨, 차씨. 이들의 후손이 지금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다면, 그 조상의 땅이 지금 홍대 앞 거리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100년의 간극이 만들어낸 이 질문은,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연결된 이야기다.


SECTION 09

9. 지금의 홍대와 100년 전 동교동 사이

같은 땅, 전혀 다른 두 세계. 1912년 동교동과 2025년 홍대 앞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것이 정말 같은 장소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다.

1912년 동교동

논 162,856㎡가 물결치고, 밭 111,362㎡에서 작물이 자라며, 26채의 집에서 농부들이 살아가는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다. 마을의 중심엔 오씨와 고씨 집안이 있었고, 뒷산 자락엔 선산이 자리했으며, 작은 숲이 마을을 감쌌다.

현재의 홍대 앞

하루 유동 인구 수만 명, 수백 개의 카페와 음식점, 클럽과 공연장이 밀집한 서울 최대 문화 상업지구 중 하나다. 같은 땅 위에 100년의 변화가 켜켜이 쌓인 결과다.

이 대비가 단순한 '옛날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지금도 홍대 앞 골목 어딘가에 오래된 담벼락이 남아 있고, 낡은 건물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그 건물들 아래 땅속에는 1912년 동교동의 기억이 잠들어 있다. 논의 물꼬를 트던 손길, 밭을 일구던 호미 자국, 선산에 제사를 지내러 오던 발자국들이 흙 속에 새겨져 있다.

재개발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 기억들이 파괴되거나 잊혀진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SECTION 10

10. 문화재 지표조사, 왜 지금 여기서 필요한가

홍대 앞과 동교동 일대는 지금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낡은 건물이 철거되고 새 건물이 올라가는 속도가 서울에서도 특히 빠른 지역 중 하나다. 성수동이 젠트리피케이션의 대명사라면, 홍대 일대는 이미 오래전에 그 과정을 통과한 곳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적 층위가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12년 기록에 있는 논 49필지의 흔적, 무덤 2필지의 위치, 오씨 집안이 살았던 대지의 자리.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보존하기 위한 사전 지표조사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미지수다.

앞으로 동교동과 홍대 일대에서 진행될 개발 프로젝트가 있다면,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무덤이 있었던 2필지의 위치를 현재 지도와 대조하는 작업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 자리를 파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한다. 읽지 않고 파면, 돌이킬 수 없다.

홍대·동교동 인근 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에서 마포구를 포함한 서울 25개 구의 1912년 토지조사 기록,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법적 절차와 비용 정보를 무료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굴조사 노트, 공사 일정 FAQ, 법적·행정 가이드까지 모두 제공됩니다.



SECTION 11

11.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는지, 마포구 인근과 서울 내 유사 지역의 사례들이 잘 보여준다.

성공 사례 1

마포구 합정동 — 조선시대 옹기 가마 발굴

합정동 일대 주거지 재개발 과정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제적으로 시행한 결과, 18세기 조선시대 옹기 가마 흔적이 확인됐다. 마포 일대가 조선시대 한강 수운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도자기와 옹기 제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발굴로 입증됐다. 지표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됐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기록이다.

성공 사례 2

서울 은평구 수색동 — 조선 전기 집터 발굴

서울 서북부 지역 개발 과정에서 1912년 토지조사 기록과 현재 지도를 교차 분석한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조선 전기 집터 유구가 확인됐다. 온돌 구조와 우물 흔적, 15세기 분청사기 파편들이 발굴됐고, 이 유물들은 현재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 전시되어 지역 역사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발굴이 지역의 역사 정체성을 만든 사례다.

성공 사례 3

서울 광화문 일대 — 조선 행정 중심지의 귀환

광화문 광장 조성 공사 중 조선시대 의정부와 육조거리 유구가 발견됐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 구역이 역사 문헌에 기록된 관청 밀집 지역과 겹친다는 사실이 미리 파악됐고, 덕분에 공사팀은 발굴 구역을 사전에 설정해 공사 중단 없이 유물을 수습했다. 현재 광화문 광장 지하에는 조선의 행정 중심지가 보존되어 있다.

이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단 하나다. 사전 조사가 전부라는 것이다. 파기 전에 읽으면 지킬 수 있다. 동교동의 논과 밭, 무덤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SECTION 12

12. 에필로그 — 거리 아래 흐르는 시간

오늘 밤 홍대 앞을 걷는다면, 잠깐 발걸음을 멈춰보자.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 문 앞, 인스타감성 카페의 유리창 앞, 사람들이 웃으며 지나치는 골목 어귀. 그 어느 자리에서든, 발 아래에 귀를 기울여보자.

들릴 리 없지만, 거기에는 1912년의 소리가 있다. 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 밭에서 김매는 호미 소리. 아이가 뛰어노는 흙마당의 발소리. 오씨 집안 할머니가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소리.

우리가 걷는 이 거리는 그 소리들 위에 지어진 것이다. 콘크리트 아래, 아스팔트 아래, 지하철 터널 아래. 그 모든 것의 가장 깊은 곳에 1912년의 동교동이 잠들어 있다.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저 가끔, 이 땅이 처음부터 지금 이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그 처음을 기억하고 지키려는 노력이,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문화재 발굴이고, 우리가 역사에 진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는 방식이다.

홍대 앞 거리는 오늘도 빠르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 거리 아래에 흐르는 시간은, 어디에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논 49개, 밭 57개,집 26채, 무덤 2기.

지금은 카페와 클럽이 들어선 그 자리에오씨 할아버지가 모내기를 했고,고씨 아이가 밭 이랑을 뛰어다녔다.

당신이 오늘 홍대 앞에서 마신 그 커피 한 잔,100년 전 같은 자리에서 자라난 벼 한 포기와같은 땅을 밟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면,이 도시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기반 콘텐츠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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