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용산 신창동, 땅 위에 펼쳐진 이야기의 시작
- 서울 HI
- 7월 27일
- 3분 분량
목차
100년 전 용산 신창동, 땅 위에 펼쳐진 이야기의 시작
1912년 신창동, 도심 속 마을의 풍경
집과 밭, 산으로 나뉜 토지의 조화
신창동 사람들, 누가 이 땅을 소유했을까?
법인과 일본인 소유 토지의 진실
문화재 발굴의 시작점, 지표조사의 중요성
서울지역 발굴조사 성공사례: 신창동의 재발견
지금 왜 신창동의 과거를 되살펴야 하는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에 의뢰하는 방법

100년 전 용산 신창동, 땅 위에 펼쳐진 이야기의 시작
“여기가 그렇게 오래된 땅이었다고요?”
서울 한복판, 아파트와 카페가 즐비한 용산구 신창동을 지나다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13년 전, 그러니까 1912년, 이 땅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물 하나하나가 스토리를 품고 있던,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마을’ 신창동. 우리는 이 땅을 지나치며 알게 모르게 그 시간을 밟고 있는 것이다.
1912년 신창동, 도심 속 마을의 풍경
1912년, 용산구 신창동은 총 99필지, 41,289㎡ 규모의 작은 마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담한 동네 같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전체 면적의 절반이 넘는 21,973㎡에는 80필지의 대지가 있었고, 이는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며 집을 지었던 공간이었다. 나머지는 임야와 밭이었는데, 각각 2필지 2,333㎡의 산, 그리고 17필지 16,981㎡의 밭이 있었다.
산과 밭, 집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던 신창동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태계였다. 언덕 위에서 부는 바람은 밭의 곡식을 흔들었고, 그 옆에서는 아이들이 달려 놀았을 것이다. 단순한 면적의 수치가 아닌, 하나하나의 삶의 단위가 있었다.
집과 밭, 산으로 나뉜 토지의 조화
놀랍게도 이 마을의 땅은 골고루 쓰였다. 대지는 말 그대로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었다. 여기에 터를 잡고 집을 짓고,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터전이었던 셈이다. 반면 밭은 생계를 위한 필수 요소였다. 17필지나 되는 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라, 마을의 경제를 이끌던 원동력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밭은 단지 작물이 자라는 곳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임야는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2필지 2,333㎡의 산은 당대 사람들에게 연료와 자원, 때론 피난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은 도시로 변해 사라졌지만, 그 산 하나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신창동 사람들, 누가 이 땅을 소유했을까?
그렇다면 당시 이 땅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기록에 따르면 김씨가 14필지를, 박씨는 8필지, 이씨는 6필지, 최씨 역시 6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네 성씨만으로 마을 대부분의 땅이 나눠졌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신창동이 하나의 공동체처럼 운영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성씨들은 아마도 마을을 이루는 중심세력이었을 것이고, 그들의 삶과 관계망은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지 모른다. 땅의 크기와 분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이다.
법인과 일본인 소유 토지의 진실
그러나 모든 땅이 마을 사람들의 손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신창동에는 9필지의 법인 소유 토지가 있었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무려 30필지의 땅이 일본인의 소유였다는 점이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의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수치는 단순한 부동산 거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단지 ‘소유’가 아닌, ‘지배’의 상징이었다. 지역의 자원을 빼앗고, 주민들을 압박하며 도시 전체의 구조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법인 토지 역시 대부분이 일본계 기업이나 친일 세력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발굴의 시작점, 지표조사의 중요성
이러한 역사 속 땅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지표조사’다. 지표조사는 문화재 발굴의 전 단계로, 해당 지역의 역사적 흔적이나 유물을 찾아내기 위한 필수 절차다. 신창동처럼 오래된 마을일수록, 그 지표조사의 중요성은 배가된다.
지표조사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땅 밑의 유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켜를 벗겨내고 그 시대의 생활상, 문화,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서울처럼 재개발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지표조사가 곧 역사 보존의 시작점이다.
서울지역 발굴조사 성공사례: 신창동의 재발견
실제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에서는 신창동 인근에서 수차례 성공적인 발굴 사례를 기록해왔다. 한 사례로는, 도로 확장 공사 직전에 이루어진 지표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가옥터와 조선시대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면서 공사의 방향이 조정된 바 있다.
이러한 사례는 발굴이 단지 ‘역사를 파는’ 작업이 아닌, 도시의 정체성을 지키는 ‘미래를 위한 투자’임을 보여준다. 단 한 조각의 기와, 단 하나의 흔적이 수십 년 뒤 그 지역의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왜 신창동의 과거를 되살펴야 하는가
도시는 항상 변한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땅의 기억’이다. 신창동이라는 이름이 단순한 행정지명이 아닌, 수백 년간의 역사와 삶이 얽힌 이야기라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지금 누군가 신창동에 아파트를 짓고, 도로를 넓히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지표조사다. 그것은 땅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에 의뢰하는 방법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기관에서는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표본조사 등 모든 절차를 책임감 있게 수행하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서울지역에서 개발이나 건축을 준비 중이라면, 발굴조사를 먼저 의뢰하는 것이 법적 의무이자 책임 있는 시민의 자세다.
문의 및 의뢰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공식 홈페이지인 https://www.seoulheritage.org 에서 가능하다.
글 출처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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