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용산구 신창동, 땅 위에 펼쳐진 이야기의 시작
- 2025년 7월 2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기관용산구 역사서울 문화유산일제강점기 토지
99필지 중 30필지의 주인이 일본인이었다— 용산구 신창동 1912년, 작지만 무거운 기록
99필지 41,289㎡의 작은 마을이 숨기고 있던 삶의 온기와 지배의 흔적 —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가 그 층위를 꺼내는 방법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seoulheritage.org·읽는 시간 약 13분
"99필지 중 30필지.
이 동네 땅 세 곳 중 하나는 일본인 소유였다.
용산구 신창동, 1912년.
이 숫자 뒤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끝까지 읽어야만 알 수 있다."
용산구 신창동. 지금은 아파트와 카페, 상가들이 빼곡히 들어선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99필지, 41,289㎡. 규모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집터와 밭, 그리고 그 옆에 조용히 스며든 식민지 지배의 흔적이 같은 땅 위에 공존하고 있었다.
이 글은 신창동 1912년 토지 기록을 한 층씩 들춰가며, 그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 왜 지금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런 땅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목차 — 이 글의 흐름
1. 신창동, 작은 마을이 품은 큰 이야기
2. 대지 80필지 — 100년 전 이 동네에 집이 있었다
3. 밭 17필지와 임야 2필지 — 생계와 자연의 공존
4. 김씨 14필지, 그리고 이 마을을 이룬 사람들
5. 일본인 30필지, 법인 9필지 — 이 숫자의 무게
6. 문화재 지표조사, 이 땅의 시간을 읽는 방법
7.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왜 순서가 중요한가
8. 성공 사례 — 서울에서 역사가 땅속에서 돌아온 순간들
9. 지금 신창동에 필요한 것10. 당신이 서 있는 땅의 기억을 지키는 법
1. 신창동, 작은 마을이 품은 큰 이야기
1912년의 신창동을 지금의 용산구 지도 위에 겹쳐 놓으면, 놀랍도록 작은 공간이다. 99필지, 41,289㎡. 지금 기준으로 축구장 약 5.8개 면적이다. 서울의 다른 동네들이 수백에서 수천 필지에 달한다는 걸 생각하면, 신창동은 확실히 작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작다고 해서 이야기가 작은 건 아니다. 1910년 한일 병합이 이루어진 지 불과 2년이 지난 시점, 이 작은 동네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식민지 지배의 현실이 같은 땅 위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건다.
용산은 일제강점기 당시 군사 및 행정의 중심지로 개편된 지역이다. 신창동처럼 용산 안에 있는 작은 마을들은 그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었다. 이 동네 땅의 기록이 단순한 부동산 통계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99필지
총 필지 수
41,289㎡
총 면적
80필지
대지(주거지)
17필지
밭
30필지
일본인 소유
9필지
법인 소유

2. 대지 80필지 — 100년 전 이 동네에 집이 있었다
80필지, 21,973㎡의 대지. 99필지 중 무려 80필지가 집이 있는 땅이었다. 전체의 80%가 넘는다. 이건 신창동이 본질적으로 주거 중심의 마을이었다는 뜻이다. 논도 없고, 큰 규모의 밭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들이 이 동네의 핵심이었다.
80채의 집. 한옥 형태의 작은 집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있었을 것이다. 아침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골목에서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저녁이면 어른들이 마당에 모여 하루를 정리하는 그런 동네였다.
주거지가 밀집된 구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온돌 구조물, 기단석, 우물, 담장 기초, 생활 도기류가 지표 아래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80필지의 집들이 남긴 흔적들이 지금도 신창동 땅속 어딘가에 층층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

3. 밭 17필지와 임야 2필지 — 생계와 자연의 공존
밭 17필지, 16,981㎡. 대지 다음으로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주거 중심 마을인 신창동에서 밭이 17필지나 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 밭들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자급의 공간이었다.
임야는 2필지, 2,333㎡. 작은 규모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산은 연료와 건축 자재, 채집의 공간이었다. 지금은 도시화로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이 2필지의 산자락이 어딘가에 남아있다면 당시 생활 방식의 흔적을 담고 있을 수 있다.
밭 구역은 문화재 조사에서 의외의 발견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농기구 잔재, 씨앗 저장 시설, 물 관리 구조물의 흔적이 지표 아래에 보존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밭 경계석이나 두렁 구조물에서 예상치 못한 역사의 단서가 나오기도 한다.
대지
80필지 / 21,973㎡ / 53%
밭
17필지 / 16,981㎡ / 41%
임야
2필지 / 2,333㎡
4. 김씨 14필지, 그리고 이 마을을 이룬 사람들
신창동 땅의 조선인 소유자들. 김씨가 14필지로 가장 많았고, 박씨 8필지, 이씨 6필지, 최씨 6필지가 뒤를 이었다. 네 성씨가 이 마을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는 건, 신창동이 몇몇 주요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이 성씨들은 단순한 토지 소유자가 아니었다. 이들이 이 동네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를 운영했는지가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중요한 맥락이 된다. 김씨가 집중된 구역에서는 김씨 가문과 관련된 건물지나 생활 유구가, 이씨 구역에서는 이씨 가문의 흔적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소유한 땅과 일본인이 소유한 땅이 어떻게 경계를 이루고 있었는지도 중요한 조사 포인트다. 경계가 있는 곳에는 경계석이 있고, 경계석은 땅속에 남는다.
김씨
14필지
최다 소유
박씨
8필지
이씨
6필지
최씨
6필지
일본인
30필지
전체의 30%
법인
9필지
일본계 추정
5. 일본인 30필지, 법인 9필지 — 이 숫자의 무게
99필지 중 30필지가 일본인 소유였다. 전체의 30%. 이 동네 땅 세 곳 중 하나는 조선인의 것이 아니었다. 한일 병합이 이루어진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이미 이 정도의 토지가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는 건, 당시 용산 일대에서 얼마나 빠르게 식민지적 토지 재편이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용산은 일제가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행정 중심을 재편하면서 가장 먼저 장악한 지역 중 하나였다. 신창동의 30필지는 그 과정의 구체적인 증거다. 그리고 9필지의 법인 소유 토지. 당시 법인 중 상당수는 일본계 기업이나 친일 세력과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용산과 일제강점기 — 신창동 30필지가 놓인 맥락
용산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병참기지로 선택한 이후 급격히 일본화된 지역이다. 1910년 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군사기지가 이 일대에 집중되었고, 주변 민간 토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인과 일본계 기업의 손에 넘어갔다. 신창동 30필지는 그 흐름의 한 조각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가진 땅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면, 일제강점기 건물 기초, 군사 시설 관련 구조물, 당시의 토지 경계석 등이 발굴될 수 있다. 불편한 역사일수록 더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대하는 책임 있는 방식이다.

6. 문화재 지표조사, 이 땅의 시간을 읽는 방법
신창동처럼 주거지 80필지, 일본인 소유 30필지, 그리고 밭과 임야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땅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는 어떻게 접근할까.
첫 단계는 항상 기록 분석이다. 1912년 토지 대장처럼 당시의 지목과 소유자 정보를 분석해 구역별로 어떤 유형의 유적이 있을지를 예측한다. 주거 밀집 구역에서는 온돌 구조물과 우물이, 일본인 소유 구역에서는 식민지 시기 건물 기초와 경계 시설이, 밭 구역에서는 농경 관련 유구가 나올 수 있다.
그 다음은 현장 답사다. 지표면에 드러난 기와 조각, 석재 잔편, 지형의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면서 역사 기록과 대조한다. 이 두 단계가 완료되면 어느 구역을 우선 시굴할지 결정된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지 않고도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비파괴적이고, 그래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단계다.
7.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왜 순서가 중요한가
STEP 1
지표조사
기록 분석·현장 관찰
비파괴 방식
STEP 2
표본조사
면적 2% 이내
탐색 발굴
STEP 3
시굴조사
10~20% 범위
예비 발굴
STEP 4
정밀 발굴
면 단위 전면
발굴·기록
신창동처럼 면적이 작은 지역에서도 이 순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오히려 작은 면적일수록 유적의 밀도가 높을 수 있다. 99필지 안에 80채의 집이 있었다는 건, 유적이 매우 좁은 구역에 밀집되어 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한 번 파괴된 유적은 돌아오지 않는다. 용산처럼 재개발 압력이 강한 지역에서 개발 전 지표조사를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는 이야기들이 생겨난다. 그 손실은 어떤 건물로도 보상할 수 없다.

8. 성공 사례 — 서울에서 역사가 땅속에서 돌아온 순간들
성공 사례 01
용산 인근 도로 확장 현장 — 고려시대 가옥터의 발견
용산 인근 도로 확장 공사 직전에 이루어진 지표조사에서 고려시대 가옥터와 조선시대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어 공사 방향이 조정된 사례가 있다.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이 유적은 도로 아래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지표조사가 수백 년의 역사를 지킨 사례다. 신창동처럼 주거지 밀집 구역에서도 언제든지 같은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다.
성공 사례 02
종로구 인사동 — 금속활자가 7개의 문화층에서 나왔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진행된 정밀 발굴에서 7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16세기 층에서는 한글·한자 혼용 금속활자, 일성정시의가 출토되어 학계를 뒤흔들었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역사를 실물로 증명한 이 발견이 가능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절차를 지켰기 때문이다.
성공 사례 03
용산구 한남동 — 1912년 토지 기록이 발굴 지도가 됐다
용산구 한남동에서 진행된 조사에서 1912년 토지 대장의 분묘지와 사사지 기록을 기반으로 시굴조사 방향을 설정한 결과, 조선시대 제의 용기와 묘비 파편이 발견되었다. 100년 전 지적도가 현대 발굴의 나침반이 된 사례로, 같은 방법론이 신창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9. 지금 신창동에 필요한 것
용산은 지금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재개발과 신축 공사가 끊이지 않는다. 신창동도 그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새 건물이 올라갈 때마다, 포클레인이 땅을 팔 때마다 1912년 이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서울 전 지역의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에 의뢰할 수 있다. 용산구를 포함한 서울 전 지역의 조사를 담당하며, 조사 설계부터 보고서 작성, 관청 인허가 절차까지 전 과정을 지원한다. 개발을 계획 중이라면 시작 전에 먼저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법적 의무이자 책임 있는 시민의 자세다.
10. 당신이 서 있는 땅의 기억을 지키는 법
신창동을 지나칠 때 한 번만 생각해보자.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아래에, 100년 전 김씨 가문 누군가의 집터가 있었을 수 있다. 일본인이 점유했던 그 땅 경계석이 아직 어딘가에 묻혀있을 수 있다. 박씨 집안 아이들이 뛰어놀던 골목의 돌이 지금 이 포장도로 아래에 있을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무시하고 개발을 진행하는 것과, 그 가능성을 확인한 뒤 개발을 진행하는 것. 결과는 같은 건물이 올라가더라도, 그 과정이 전혀 다르다. 지표조사를 거치는 것이 그 차이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99필지라는 작은 마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그 증거를 지키는 일은 문화재 전문가만의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관심에서 시작된다.

신창동의 그 작은 마을, 99필지 위에
집을 짓고 밭을 갈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옆에 조용히 스며든 지배의 흔적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닌 지금을 위한 일입니다.
그 기억을 지키는 첫 걸음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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