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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도봉구 쌍문동의 땅이 들려준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발굴해야 할 것들

  • 2025년 11월 23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4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조사 · 서울 도봉구 쌍문동 역사 · 동양척식주식회사 · 유적발굴단 · 발굴조사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시절의 땅이, 지금 여기 서 있는 우리를 이렇게 흔들어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서울 도봉구 쌍문동.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골목 카페, 오래된 주택과 공원이 자연스럽게 섞인 동네지만, 1912년의 이곳은 철저히 땅의 기록만으로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550필지 1,176,084㎡. 논이 216필지, 밭이 258필지, 이씨 127필지가 지배하던 그 들판. 그리고 그 안에 동양척식주식회사 20필지의 그림자가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이 글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1912년 쌍문동 토지 기록을 바탕으로,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의 실제 현장을 연결하는 생생한 여정이다. 계속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 동네에 이런 숨결이 있었구나' 하고 가슴 깊은 곳이 묘하게 뜨거워질 것이다.


목차

11912년 쌍문동의 풍경을 다시 걷다

2논, 밭, 집터… 땅이 기록한 쌍문동의 지형

3조용히 잠든 분묘와 산의 기억

4성씨들이 남긴 1912년 토지 지도

5공유지·국유지·동양척식주식회사, 땅의 소유가 말해주는 시대

6일본인 한 필지의 흔적이 남긴 질문

7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8실제 서울 발굴조사의 성공 사례

9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게 된 이유


550

총 필지 수

1,176,084㎡

총 면적

258

밭 필지

216

논 필지

20

동양척식 소유

127

이씨 필지


1. 1912년 쌍문동의 풍경을 다시 걷다



당시 쌍문동 전체는 550필지 1,176,084㎡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 면적 속엔 빼곡한 집도 없고 번화한 상권도 없었다. 대부분 논과 밭,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묵묵히 지탱하던 토지가 전부였다. 지금 발굴 현장에서 흔히 발견하는 기와 조각, 생활 도구의 흔적, 땅속의 미세한 층위들은 바로 이런 풍경의 연장선이었다.

누구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남기지 않았고, 드론 촬영도 없었으며, 길 이름조차 지금과 달랐던 그때. 하지만 그 시절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도 한 장, 필지 번호 하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정확하고 또렷하게 말을 건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쌍문동 기록을 들여다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시리즈에서 함께 들여다본 창동(735필지 2,399,428㎡), 중계동(577필지 1,761,561㎡)과 비교하면 쌍문동은 550필지 1,176,084㎡로 규모와 면적 모두 비슷한 층위에 있다. 도봉구 북부권을 이루던 이 세 동네가 모두 광대한 농경지를 기반으로 한 마을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2. 논, 밭, 집터… 땅이 기록한 쌍문동의 지형



1912년 쌍문동은 놀라울 정도로 농경지가 많았다. 논 216필지 621,867㎡, 밭 258필지 380,596㎡. 두 농경지를 합치면 474필지로 전체 550필지의 86.2%다. 쌀을 심고, 보리를 베고, 밭을 갈던 손길이 이 들판을 채웠다. 창동의 89.4%에는 미치지 않지만, 쌍문동 역시 서울 북부권을 대표하는 농경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이 숫자로 증명된다.

대지는 58필지 36,195㎡였다. 필지 수로는 전체의 10.5%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거 밀집 개념과는 전혀 다른, 농업 생태계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작은 취락 형태였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구조를 가진 지역을 조사하면 초가 형태의 생활 유구가 띄엄띄엄 발견되고, 그 주변으로 농기구 흔적이나 생활용 토기 조각이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다.

특히 밭 258필지가 논 216필지보다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논보다 밭이 많다는 것은 쌍문동의 지형이 완전한 평지가 아니라, 경사지를 끼고 있는 구릉형 지형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도봉산 자락과 이어지는 지형 조건이 논농사보다 밭농사에 더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258필지

380,596㎡

216필지

621,867㎡

대지

58필지

36,195㎡

임야

16필지

132,955㎡

분묘

1필지

1,071㎡

공유지

21필지

마을 공동

쌍문동 농경지 비율: 논+밭 474필지 / 전체 550필지 = 86.2%. 임야 16필지 132,955㎡는 도봉산 자락과 연결된 산지의 흔적이다. 이 두 요소가 쌍문동 발굴조사에서 출토될 유구의 성격을 결정하는 핵심 지표가 된다.


3. 조용히 잠든 분묘와 산의 기억



단 한 필지 1,071㎡의 분묘지. 숫자로 보면 작지만 그 안에는 한 가족의 삶과 죽음, 고요히 누워 있던 시간들이 압축돼 있다. 쌍문동에서 이 분묘지 1필지가 어느 구역에 있었는지를 추적하면, 그 주변으로 당시 주거지나 공동 생활 공간이 함께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묘지는 언제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활권 인근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발굴조사를 처음 해보는 조사원들이 가장 놀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산비탈에서, 누군가의 삶의 잔해가 그대로 나오는 순간. 임야 16필지 132,955㎡는 지금의 도봉산 자락과 이어졌던 산의 기운이 남아 있는 구역이다. 이 임야 지역은 발굴조사에서 특별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구역이기도 하다. 분묘 관련 유물이나 제례 관련 유구가 함께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4. 성씨들이 남긴 1912년 토지 지도



쌍문동에서 가장 많이 땅을 소유한 성씨는 이씨, 무려 127필지였다. 김씨 64필지, 편씨 39필지, 유씨 35필지, 전씨 26필지가 그 뒤를 이었다. 이씨 127필지는 전체 550필지의 23.1%다. 이 시리즈에서 함께 들여다본 창동의 이씨 153필지(20.8%)와 비슷한 구조다. 이씨 집안이 서울 북부권 도봉·창동 일대에서 가장 강한 지역 기반을 가진 성씨였다는 사실이 두 기록에서 동시에 드러난다.

편씨 39필지와 유씨 35필지의 존재도 흥미롭다. 이 두 성씨는 이 시리즈의 다른 동네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쌍문동만의 독특한 성씨 분포다. 특정 성씨가 집중된 지역은 그 가문의 생활 터전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발굴조사에서 그 구역을 집중 조사하면 해당 집안의 생활 흔적이 한층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성씨별 토지 소유 분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당시의 이주 흐름, 생활권, 마을 구성까지 그대로 드러낸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성씨 일가가 어디에 살았는지 파악하면, 초가집 터, 생활유물, 저장창고 터 같은 구조들이 실제 발굴 구역과 놀랍도록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반복해서 보고된다.

127

이씨 필지

64

김씨 필지

39

편씨 필지

35

유씨 필지

26

전씨 필지

20

동양척식

21

공유지

1

일본인 소유


5. 공유지·국유지·동양척식주식회사, 땅의 소유가 말해주는 시대

공유지는 21필지였다. 마을 공동의 삶을 위해 모두가 함께 이용했던 토지다. 공동 우물, 마을 광장, 공동 창고, 마을 제당이 공유지 위에 자리 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발굴조사에서 공유지 구역은 마을 공동체의 공공 시설 유구 출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점으로 분류된다.

국유지는 단 한 필지였다. 행정 기능의 흔적이 아직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던 외곽 농경 지역으로서의 쌍문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 20필지다.

이건 단순한 토지 소유 기록이 아니다. 그 시절 쌍문동에도 조용히 스며든 일제의 경제적 침투가 데이터로 드러난 것이다. 이씨 127필지, 김씨 64필지가 지키고 있는 쌍문동 안에, 동양척식 20필지와 국유지 1필지, 일본인 소유 1필지가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조용한 침투의 흔적이 발굴조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는 발굴이 이루어져야만 알 수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20필지 / 총 550필지 = 3.6%. 창동(14필지·1.9%)보다 높고, 중계동(30필지·5.2%)보다 낮은 비율이다. 도봉구 쌍문동과 창동이 나란히 동양척식 소유지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서울 북부 농경 지대 전반에 걸친 식민지 토지 정책의 실태를 보여준다.


6. 일본인 한 필지의 흔적이 남긴 질문

1912년 쌍문동 일본인 소유 토지는 단 한 필지. 이 시리즈에서 도심지인 을지로5가(33필지), 의주로1가(37필지)와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작은 숫자다. 그러나 이 '단 한 필지'가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왜 이 외곽 농경 마을에 일본인이 한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을까

?어떤 용도로 사용됐을까

?도심 진출의 교두보였을까, 아니면 농지 수탈의 시작이었을까

이런 질문 하나가 유적 발굴의 방향을 바꾼다

결국 발굴조사원들이 땅을 파는 이유는 땅속에서만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땅 위에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함이다. 이 한 필지가 어느 구역에 있었는지를 특정하는 순간, 쌍문동 발굴의 이야기가 훨씬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7.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쌍문동은 지금도 개발이 진행되고, 리모델링이 이루어지고, 새 건물들이 꾸준히 들어선다. 이때 꼭 필요한 게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다. 잘못된 개발은 과거를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땅속에 숨어 있는 유물은 다시 만들 수도, 다시 찾을 수도 없다.

문화재발굴조사 장비 하나하나가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복원하고, 문화재 발굴은 곧 우리 공동체의 기억을 지켜내는 작업이다. 550필지의 기록이 알려주는 쌍문동의 과거를 알아야만,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가 보인다. 기록이 있을 때 발굴 방향이 정밀해지고, 방향이 정밀할수록 잃어버릴 뻔한 역사가 더 온전히 돌아온다.


8. 실제 서울 발굴조사의 성공 사례

성공 사례 — 청계천·세운지구·왕십리 발굴의 교훈

청계천 복원 당시 출토된 상평통보·기와·도자기 조각들은 조선 시대 서울 상업권의 실체를 드러냈다. 세운지구에서 발견된 조선 후기 주거지 흔적은 도시 생활사 연구의 기준점이 됐다. 왕십리 개발 과정에서 드러난 대규모 생활유구는 그 지역이 서울 농업경제에서 가진 위치를 새롭게 조명했다. 이 모든 작업이 문화재발굴단의 땀과 기술, 그리고 유적 발굴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쌍문동에서도 같은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참고)

쌍문동의 이씨 127필지가 집중된 구역, 편씨·유씨가 자리 잡은 구역, 동양척식 20필지가 있던 구역. 이 세 구역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서울 북부 농경 문화 연구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다.


9.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게 된 이유



쌍문동의 1912년 기록은 우리의 뿌리와도 같다. 지금 집을 짓고, 길을 만들고, 도시를 확장하는 모든 순간에도 땅은 말을 하고 있다. "나를 한 번만 더 들여다봐 달라"고.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하고 있다. 550필지 1,176,084㎡ 안에 이씨·김씨·편씨·유씨의 삶이 있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가 있었으며, 아무도 기록하지 못한 수많은 하루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사라지는 건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간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은, 이미 그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다.

땅은 말이 없지만, 결코 침묵하고 있지 않다.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 반드시 말을 건다.

1912년 쌍문동의 550필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도봉산 자락 아래, 이씨·편씨·유씨의 발자국과 함께


그 땅이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귀 기울이는 한, 쌍문동의 시간은 계속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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